최근 가파른 물가 상승이 지속되면서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정부가 비상경제대응체제로 전환해 물가 안정에 주력하고 있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를 뛰어넘는 ‘퍼펙트스톰(총체적 복합위기)’이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제기되고 있을 만큼(바로가기) 단기간 내 지금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물가 상승이 사망률 증가와 통계적으로 유의한 상관성을 가진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된 바 있듯이(바로가기), 경제 위기는 건강의 위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늘 문제는 불평등이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은 사회경제적 하위계층에 집중된다. 현재도 에너지 품목을 제외하면 주로 식자재와 같은 생활필수품 영역에서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다.
이러한 품목에 대한 지출 비중이 큰 저소득층일수록 가처분소득이 감소함에 따라 의료비 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그 결과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때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재난적 의료비 지출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지게 되고, 이는 결국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 위기는 이밖에 실직, 과로, 심리적 압박 등 여러 다양한 경로와 기전을 통해 건강을 위협한다.
정부는 저소득층 긴급생활안정지원금, 여름철 에너지 바우처 지급 등을 포함한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를 발표했지만(바로가기), 지금의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더욱이, 계속된 금리인상이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수많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뚜렷한 대안을 찾아보기 어렵다.
얼마 전 대통령의 발언과 같이 지금은 “국민들 숨이 넘어가는” 경제적 비상사태다. 정부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의 삶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강력한 재정지원정책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정부는 최근 기업 법인세와 각종 부동산세 감면을 ‘경제정책방향’으로 제시했다. 세수감소가 불가피한 이러한 정책들을 추진한다면 그만큼 재정 여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면서도 ‘두터운’ 지원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부는 감세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이 투자를 활성화하고 고용을 늘리면 결과적으로 세수 증가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보수정권 시절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대기업에 각종 혜택을 몰아줬지만 고용과 세수는 늘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역사적, 경험적 근거도 없는 낙수효과론을 지금과 같은 위기 국면에서 또다시 꺼내 들다니 안타깝고 답답할 따름이다.
정부의 재정 긴축과 기업규제 완화, 근로시간 유연화, 공공기관 민영화 등과 같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시장만능주의’ 정책 노선은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는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지키는 방어 논리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길을 고집한다면 지금의 위기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도대체 누구의 관점에서, 누구를 위한 국정운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현재까지 나타난 정책 행보만 놓고 봤을 때는 사회경제적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편향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는 재벌 대기업의 청부업자가 아니다. 정부의 일차적 사명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고, 이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대통령의 본령 아닌가?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는 의미가 없는 법이다. 대재앙과 같은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유연하게 입장을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아직 50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대통령의 권한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시기다.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이 있다면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보다 과감하고 근본적인 개혁 조치들을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를 더 정의롭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기회로 삼길 바라며 대통령을 향해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먼저, 지금의 경제 위기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이들의 관점에서 국정을 운영하라.
지난 2년 반의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누적된 고통의 크기와 양상이 어떠할지 구체적으로 헤아리고 공감하라.
본래 거리가 멀어질수록 공감하기 어려운 법이니, 취약한 이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이들을 정책결정라인에 적극 배치하라.
지금의 경제 위기가 사회경제적 취약계층들에게 앞으로 어떠한 피해를 끼치게 될지 다양한 시나리오로 예측 분석하여 대책 수립의 근거로 활용하라.
경제 관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의심하라. 어떠한 정책도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범죄 수사와 마찬가지로 해당 정책을 통해 누가 이득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따져보라. 그래야 기득권 편향적 정책 기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통령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는 본래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안된 정치체제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출된 대표의 ‘반응성’(responsiveness)에 있다. 대통령은 이미 용인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라는 시대적 과제에 응답해야 한다.
이와 함께 그동안 지고지순의 목표로 여겨 왔던 경제성장 패러다임을 해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GDP 증가만으로 국민 행복이 보장되는 시대는 지났고 국민은 맹목적 성장을 원하지 않는다.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국정 목표로 제시한)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연대, 평등에 기반한 지속 가능한 대안적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들의 실질적 자유를 확장하는 길이고, 이 시대가 정치공동체의 지도자에게 부여한 마땅한 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