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권력 관계를 바꾸는 건강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312회 조회됨

김지민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무엇이 건강불평등에 영향을 미칠까? 권력과 같은 정치경제적 요인은 건강불평등을 직접 초래하지는 않지만, 기저에서 현 상황을 유지하거나 바꿔내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권력은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같은 사회이론이나 생의학모델 같은 특정 패러다임을 통해 규범과 인식에 스며들어 정책 결정자들의 선택을 제한함으로써 공공정책의 편향을 발생시킨다. 또한 전문가주의라는 구조적 힘은 공중보건 위기를 만들어내는 ‘조건’을 다루기보다는, 이미 취약한 인구의 건강 상태 완화 혹은 증진이라는 결과에 집중함으로써, 개인의 건강증진행위와 의료전달체계에만 집중하는 공중보건정책을 지속시킨다. 이처럼 권력불평등은 보건정책에서 국가와 시장 우위의 제도 경로성을 심화시키고 자원불평등을 야기함으로써 건강불평등을 악화시킨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이러한 권력구조에 어떻게 도전할 수 있을까?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고한 힘을 바꿔내고, 건강 형평성을 달성할 수 있도록 공공정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 소개할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논문 바로가기 ☞ 권력과 시민의 건강). 프리엘 연구팀은 호주의 7개 정책 사례 각각에 관한 국가, 기업, 시민사회 영역의 주요 행위자들 총 158명을 인터뷰하고, 시민사회 행위자들이 건강 형평성을 제고하기 위한 구조적 변화를 어떻게 달성해냈는가를 규명했다.

 

저자들은 사례 분석을 바탕으로 구조적 약자들이 건강 형평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세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새로운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공공정책은 대체로 국가 관료나 기업, 일부 전문가를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논의되고 결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처럼 기존의 제도적 장이 시민사회 행위자들에게 닫혀있는 경우, 이 행위자들은 시민들에게 해로운 정책 결정을 하는 숨겨진 장소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시민들의 참여와 숙고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요구하거나 직접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담론 권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시민사회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전문적이고 도덕적인 힘을 축적하고, 또 설득력 있는 새로운 서사나 프레임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전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유급 육아 휴직 운동(Paid Parental Leave, 이하 PPL)’의 사례이다. 호주에서는 오랫동안 PPL이 철저히 노사관계의 문제로 여겨져 왔으며, 이 관계 하에서 기업/고용주는 자신들의 힘을 발휘해 PPL을 반대해왔다. 노사관계의 장은 외부 행위자들에게는 닫혀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에 노동조합은 인권단체나 여성단체 등 노사관계의 바깥에 있는 조직들/사람들과 논의하고 이들을 끌어옴으로써, PPL을 보다 광범한 사회적 의제로 이슈화시켰다. 이처럼 노사 이외의 새로운 주체들의 관여가 가능해지고 논의의 장이 개방적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호주에서 PPL 논의는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PPL을 요구하는 이들이 성 평등, 재생산 건강 및 아동 건강, 여성의 노동 가치 및 생산성에 관한 새로운 프레임을 함께 제시한 것 역시 PPL의 도입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다.

 

세 번째 전략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기존의 닫혀있던 제도적 과정을 활용하거나 혹은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가령 호주의 선주민 지도자와 공동체들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주도 조직들을 만들어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저항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또한 이 조직들은 격차 줄이기(Closing the Gap) 정책을 통해 정부의 정책 파트너가 되고 자금을 지원 받게 됨으로써 연방정부의 제도 정치 내부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파트너십 내부의 권력 불평등과 이로 인한 한계가 지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 조직의 지속적인 저항은 중요한 사회적 변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건강 형평성을 달성하기 위한 장기전에서 권력에 대한 고려는 필수적이며, 권력 불평등을 조정해나가기 위해서는 권력의 다양한 유형, 형태, 층위, 장소에서 기존의 권력 구조를 유지하는 힘을 방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의 시도로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없고 또 그 시도가 늘 성공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기업의 영향력을 줄이고 더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릴 수 있게 만들려는 세계 곳곳의 창의적인 투쟁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 큰 변화로 가기 위해 동료 시민들에게 연대하고 동참하자.

 

* 서지정보

 

Friel, S., Townsend, B., Fisher, M., Harris, P., Freeman, T., & Baum, F. (2021). Power and the people’s health. Social Science & Medicine, 282, 114173.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시민건강연구소 정기 후원을 하기 어려운 분들도 소액 결제로 일시 후원이 가능합니다.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