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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계층’이 없는 사회를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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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 4일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열고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확정했다. 지난 5월까지 작년보다 약 36조원 세금이 덜 걷힌 상황임에도 재정건전성 원칙과 긴축재정 기조를 재차 강조하였다. 하반기에도 비관적 경제전망이 우세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감세 정책을 고수하면서 국채 발행을 통한 추가경정예산 편성으로 세수 결손을 메꾸지는 않겠다고 한다. 각종 기금들의 여유 재원을 최대한 끌어오더라도 부족분을 채우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정부의 남은 선택지는 원래 쓰기로 한 예산을 ‘불용(不用)’하는 것 정도 밖에 없어 보인다.

 

이러한 자기 모순적 국가살림 방침이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미칠 부정적 여파가 걱정스럽다. 대통령이 말한 ‘재정다이어트’가 결국 누구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될 것인가? ‘약자복지·취약계층 지원’ 과제가 경제정책방향에 포함되었다지만, 과거 사례를 돌이켜 볼 때(☞관련 기사: 바로가기) 아무래도 이들에 대한 지원정책이 위축될 위험이 높아 보인다. 특히 반지하 가구 침수방지시설 설치비 지원처럼 지엽적인 단기 정책이 아니라, 공공임대주택 공급과 같이 주거안정성 개선에 크게 기여하지만 많은 재정이 투입되어야 하는 중장기 정책들의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 우려스럽다.

 

이런 걱정이 기우가 되길 바란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 침체와 긴축재정 기조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취약계층 지원정책의 우선순위가 높아야 한다. ‘취약계층 지원강화’는 역대 모든 정부에서 빠짐없이 등장한 정책 목표였지만, 이들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이 문제가 정책의제로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음을 방증하는 경험적 근거로 볼 수 있다.

 

 

취약계층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해 왔다. 다만 이를 자연발생적 현상으로 바라보는지, 아니면 구조적 원인에 의한 사회적 현상으로 인식하는지에 따라 대응 목표와 범위, 강도가 달라질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취약계층’은 무슨 의미일까?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취약계층이란 단어는 코로나19 영향으로 보도가 급증했던 2020년 3월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매년 여름(6~8월)과 겨울(12~2월)에 사용 빈도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즉, 폭염과 한파의 도래와 추이에 따라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감이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갈수록 폭염 발생 빈도와 강도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주거취약계층의 고통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데 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매해 반복되는 냉방비·냉방용품 지급, 무더위 쉼터 운영, 난방비 지원과 방한용품 지급과 같은 정책 대응은 비일상적 위기를 맞아 일시적으로 개입하는 ‘하류(downstream)’ 접근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년 중 9개월이 종합대책 기간일 정도로 기후변화취약계층에게 위기는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스스로 힘으로 주거취약 상태를 벗어나기 힘든 현실적 제약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취약계층 보호가 중요한 목표라면 왜 ‘상류(upstream)’ 접근을 통해 구조 문제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일까?

 

주거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상자가 중복되긴 하지만, 의료 취약계층, 금융 취약계층, 정보 취약계층, 에너지 취약계층, 교육 취약계층, 보행 취약계층, 행복 취약계층 등 취약계층의 용례를 살펴보면, 단순히 저소득층, 장애인, 노인 뿐 아니라 다양한 범주의 집단이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취약계층’으로 묶어 지칭하는 것은 사회적 관심과 도덕적 의무감을 촉발하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복잡다단한 양상과 맥락이 ‘취약계층’이라는 단일한 표상 속으로 융해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 ‘취약계층’으로 규정되는 순간 이들은 그 언어적 한계 속에서 인식되고 다뤄질 수밖에 없다.

 

지금 시대의 유행어이기도 한 취약성(Vulnerability)은 인간 보편의 존재론적 의미와 함께 특정한 조건과 속성을 지닌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상황적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취약계층은 후자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취약성은 그 어원상 ‘상처 입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초점이 미래 시제에 맞춰져 있다. 대비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측면이 있는 반면,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는 피해와 고통에 주목하지 않고, 또 왜 취약한 상태가 되었는지 과거를 묻지 않는 한계가 있다.

 

취약함이란 옷과 피부가 벗겨진 것처럼 외부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와 같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취약성을 노출과 민감도, 적응능력의 함수로 정의하듯이, 취약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적 조건을 교정하거나 외부 위험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개인주의적 접근이 우세한 오늘날 사회적 맥락에서는 대응의 초점이 철저히 개인의 ‘내부’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취약함을 개별 당사자의 무능, 무력, 결핍 등의 부정적 속성과 연관 지으면서 말이다.

 

취약계층 담론에서 취약한 이들은 국가에 의존하는 수동적 존재이자 사회적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타자로 묘사된다. 따라서 자원배분의 정당성에 대한 규범적 당위를 함축하고 있지만, 동시에 주체성의 약화와 함께 특정 집단의 범주화에 따른 사회적 낙인과 배제를 야기하는 측면이 있다. 결과적으로 개인화되고 탈정치화된 해결방식을 강조함으로써 사회구조적 원인을 은폐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취약계층 문제라는 가림막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폐된 구조에 관해서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모두를 취약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시스템 속에서 취약계층과 비취약계층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계층 사다리에서 좀 더 높이 올라간 ‘덜’ 취약한 사람과 그보다 아래에 있는 ‘더’ 취약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불평등 구조는 ‘추락’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며 ‘취약계층’이라는 ‘환상’에 의지해 안도감을 찾도록 만든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온정주의로 포장된 국가의 통상적인 ‘취약계층’ 접근법은 기존의 불평등 구조를 떠받치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통치술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취약계층’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 한다면, 취약계층 문제에 대한 근본 대책의 부재 역시 단순히 정치적 소심함 때문은 아닌 것이다. 취약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에 주목하기 위해서라도, ‘취약계층’이라는 표상이 사라진 사회를 상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먼저 ‘취약계층’을 ‘소외집단’이나 ‘권력박탈집단’ 등으로 재명명하는 사회적 운동을 시작으로 ‘취약계층’의 ‘파상(破像)’을 추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이 취약계층 문제에 ‘필사적’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공감은 편향되고 제한적인 ‘정서적 공감’이 아니라, 직접 함께 고통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고통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는 ‘인지적 공감’일 테다. 우리 모두 취약함으로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는 존재들이라는 인식과 공감의 확산에서 희망의 단초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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