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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황무지’를 개간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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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외국인 가사노동자 시범사업 계획안이 발표되었다. 빠르면 연내 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해 3월 외국인 가사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이하 ‘가사근로자법’) 개정안에 대해 제기된 ‘국적·인종 차별’이라는 비판을 고려한 듯 최저임금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비용절감이 핵심 동기인데, 과연 실제로 최저임금이 지급될지 의문이다. 애초 제도 도입을 주장한 측에서 최저임금 적용에 회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 머물며 생활하는데 자국의 임금 수준을 거론하며 최저임금 적용에 반대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자국의 물가 수준에 맞춰 재화와 서비스도 구매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설사 최저임금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외국인 가사노동자 제도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이미 많은 비판이 제기된 것처럼, 정부가 목표로 내세운 저출생 대책으로 유효하지 않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정책의 수단적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 곳곳에서는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인간적 삶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착취가 만연한 사회적 현실을 고려할 때 새롭게 들어오는 여성 가사 노동자의 인권 역시 제대로 지켜지기 어렵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특히 집이라는 가장 사적이고 폐쇄된 공간에서 고용자와 접촉이 불가피하게 이뤄지는 가사·육아 노동의 특성상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더 클 수밖에 없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입주형이 아닌 출퇴근형 가사노동제로 시행한다고 해서 이러한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규제를 강화하더라도, 사적 공간에 대한 철저한 감시·감독이 어렵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일자리를 잃고 자국으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당사자가 피해 사실을 숨길 우려도 없지 않다. 고용자와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는 건강문제가 발생해도 의료 이용을 회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함으로써 이들의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이미 관련 제도를 시행 중인 다른 국가들에서 각종 인권 침해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 않은가.

 

자국 이기주의가 팽배한 냉혹한 국제 정세에서 다른 나라 사람의 인권 보호를 말하는 게 공허한 외침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 탈민족주의적인 세계시민적 연대에 나서기 어려울지라도, 생계 부양을 위해 돌봐야 할 가족을 두고 떠나오는 이주 돌봄 노동자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러한 글로벌 돌봄 부정의에 대해서만큼 많은 이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편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은 돌봄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해 온 성차별적 노동 구조를 공고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최근 가사근로자법이 제정되었지만, 가사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는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고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유입은 기존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단과 전망에 동의한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돌봄노동시장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장시간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현재의 돌봄노동시장 근로환경 개선 없이 외국인력으로 인력부족을 충당하는 방식은 돌봄노동시장 전체의 임금과 근로환경, 조건 등을 제약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돌봄노동시장이 열악해짐에 따라 현재 종사하고 있는 내국인 종사자도 배제되거나 유입되기 어려우며 돌봄노동시장의 악순환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노동연구원, <돌봄서비스업 외국인 노동시장 연구>, 2022년, 156쪽)

 

가사 인력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인정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간병과 노인 돌봄 등 다른 돌봄노동의 부족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따라서 ‘저렴한’ 외국인 돌봄 노동력을 수입하려 할 게 아니라 기존의 (젠더불평등에 기인한) 차별적 임금 체계와 부정의한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철저히 저평가되었던 돌봄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상품으로써 돌봄의 교환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각자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돌봄 불평등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돌봄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 재평가는 돌봄을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공공재로 재인식하고 돌봄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과제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는 필요한 양질의 돌봄을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돌봄 중심 사회로의 변화는 정책적 접근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보다 넓고 깊은 차원에서의 사회 ‘변혁’이 필요한 과제다. 이는 돌봄을 ‘하찮은’ 일로 간주해 온 통념을 깨뜨리고, 우리 모두 돌봄의 주체로서 서로 좋은 돌봄을 주고받을 권리와 의무를 공유한다는 인식을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문화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돌봄노동의 무가치화가 본래 그러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낸시 프레이저의 진단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경제 위기만이 아니라 돌봄, 생태계 등의 위기를 함께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돌봄과 가사 등의 재생산 노동을 부불노동으로 고착시키고, 자연 자원의 수탈과 생산 노동에 의한 자본축적을 ‘유일한’ 인류사적 발전과정으로 간주해 온 결과 지금의 복합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사회경제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돌봄 위기는 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리고 동시에 돌봄 위기가 돌봄을 사회변혁의 원리로 삼아 새로운 대안적 사회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지난해 처음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을 제안했던 서울시장은 최근 자신의 SNS에 “황무지에서 작은 낱알을 찾는 마음으로” 제도를 제안했다고 썼다. 우리는 긴박하고 거대한 돌봄 위기 앞에서 “작은 낱알”이나 찾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돌봄의 황무지를 개간하려면 황폐화된 원인을 찾아 변화시켜야 한다. 돌봄 위기 시대는 막혀 있는 수로를 찾아 뚫는 ‘돌봄 혁명’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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