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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환경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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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트랜스젠더는 태어났을 당시 지정된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필요할 경우 본인이 정체화하는 성별에 따라 호르몬 요법이나 외과적 수술을 받기도 하고 법적 성별과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당사자가 스스로 정체화하는 성별에 맞춰 형, 누나, 언니, 오빠 등의 호칭으로 부른다. 이는 모두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트랜스젠더의 삶과 건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최근 미국에서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호르몬 요법이나 외과적 수술 같은 의료적 조치를 통해 본인의 성별을 확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되어 큰 우려를 낳고 있다. 2023년 9월 15일 기준으로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 등 22개 주에서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성별 확정과 관련된 의료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의료적 조치를 제공하는 의료진을 처벌할 뿐만 아니라 몇몇 주에서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성별 확정 과정에 함께하는 부모까지 처벌하기도 한다. 미국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총 35.1%가 해당 법안이 통과된 주에 거주하고 있어 해당 법안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정된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이처럼 성별 확정과 관련된 의료서비스 제공을 금지하는 법안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혹은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법·정책들이 존재한다. 오늘 소개할 연구에서는 미국의 각 주별 트랜스젠더 관련 법적·정책적 환경이 해당 주의 트랜스젠더 청소년 정신건강 전문가의 비율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분석하였다(☞논문 바로가기: 미국 주별 정책과 트랜스젠더 청소년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가능성의 상관관계).

 

연구진은 트랜스젠더 권리와 관련된 법·정책 33개를 총 6개의 범주로 구분하였다: 1) 관계 및 친권 인정, 2) 차별 금지, 3) 교육, 4) 보건의료, 5) 사법제도, 6) 신분증. 구체적으로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이유로 한 공공시설 이용 관련 차별 금지 및 혐오범죄로부터의 보호, 트랜스젠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괴롭힘 방지, 성별 확정과 관련된 의료적 조치에 대한 보험 적용 거부 금지, 그리고 출생신고서 상의 성별 변경 허용 등이 각 주별 트랜스젠더 권리에 관한 법·정책으로 포함되었다.

 

2021년 말 기준으로 미국의 50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청소년 정신건강 전문가는 총 29,362명이며, 주에 따라 최소 18명(노스다코다)에서 최대 3,946명(캘리포니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를 각 주의 트랜스젠더 청소년 추정 인구수로 나누어 주별 트랜스젠더 청소년 정신건강 전문가 비율을 산출하였다. 트랜스젠더 청소년 인구 대비 트랜스젠더 청소년 정신건강 전문가 비율은 평균 0.238이었으며, 최소 0.038(미시시피)에서 최대 0.747(워싱턴 DC)까지 분포하였다.

 

분석 결과, 트랜스젠더의 권리에 대해 제한적인 법·정책이 더 많은 주일수록 트랜스젠더 청소년 정신건강 전문가의 비율이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연구들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환경에서 트랜스젠더의 정신건강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이 연구는 거기서 더 나아가 본인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겪는 정신건강상의 어려움은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삶과 경험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진 정신건강 전문가의 부족으로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의 트랜스젠더 청소년들도 본인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내 성교육 시간에 성소수자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최근 교육부의 초·중등 교육과정 개정안에서는 ‘성소수자’라는 용어가 삭제되어 논란이 되었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이러한 환경 속에서 트랜스젠더 학생들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맞지 않는 교복을 입고 태어났을 때 지정된 성별에 따라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제한하는 제도적 차별로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사유로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고 있다는 점, 성별 확정 관련 의료적 조치에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법적 성별정정 요건이 매우 엄격하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오늘 소개한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우선,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트랜스젠더, 특히 트랜스젠더 청소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을 개발하고 제공해야 한다. 또한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필요할 때 정신건강 전문가를 만날 수 있도록 정신건강 관련 서비스의 장벽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정책을 입법하고 시행하여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회 속에서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정신건강이 향상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지 정보

 

Hollinsaid, N. L., Price, M. A., & Hatzenbuehler, M. L. (2022). Transgender-specific adolescent mental health provider availability is substantially lower in states with more restrictive policies. Journal of Clinical Child & Adolescent Psychology, 1-12.

 

Human Rights Campaign. “Gender-Affirming Care Bans Impacting Youth.” https://www.hrc.org/resources/attacks-on-gender-affirming-care-by-state-map. Accessed on 13 Oct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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