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열리던 축제를 보러온 158명의 사람들을 이태원 작은 골목에서 한 순간에 잃었던 그날이 다가온다. 1년이 지나도 선연한 그 밤의 장면들은 여전히 비현실적이고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 참사 현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아직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봐왔던 대형 재난에서는 형식적이나마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총리나 장관이 있었고, 사고를 키운 누군가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드러났으며, 책임을 둘러싼 투쟁과 정치가 작동한 결과 일부 법과 제도가 제·개정되는 절차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그 한가운데에는 재난을 촉발시킨 구조적 원인들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이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함으로써 그 슬픔과 고통을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나눠 감당하는 것으로 ‘보여지게 하는’ 사회적 의례였다.
‘보여지게 하는’ 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전히 지속되는 비슷한 사고들이 소중한 동료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고, 정부와 국가권력은 사회적인 공분이 힘을 잃을 때까지 ‘시간 끌기’ 전략으로 책임을 둘러싼 정치가 약화되도록 방치하기 때문이다.
이태원참사는 어떤가? 최소한의 기대된 절차도 없었다. 참사발생 직후 영정도, 위패도, 유가족도 없는 분향소에서 시작된 국가애도기간은 기이한 수습을 알리는 출발이었다.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소송에서 국가는 침해된 피해자권리를 적극 구제하기보다는 법리적 판단만을 중심으로 한 소극 대응으로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우선했다. 희생자들에게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린 책임을 부과하는 것, 참사 1년 동안 이 잔인한 정치가 목표했던 바이다. 마침내 지난 7월까지 그간 구속되었던 경찰 지휘부와 중앙정부와 용산구 책임자들이 차례대로 모두 석방됨으로써 국가는 참사의 책임에서 스스로를 면책시켰다. 그러나 생명과 안전보장에 대하여 포괄적 위임을 받은 국가의 책임이 법률 위반을 다투는 형사범죄의 심판을 통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인가.
이태원참사는 출범한지 얼마 안 된 윤석열정권에 치명타를 줄 것으로 보였다. 사건의 비통함과 충격이 너무 컸고, 당일에 보인 행정과 치안의 공백이 목적한 바가 시민의 안전이 아니라 정권의 보위였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소재를 파헤치지 못한 채 국정조사와 청문회가 지나갔고, 유가족과 시민들이 만들어낸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정부와 여당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만큼이나 이후 책임의 구조를 잘 재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책임의 당사자가 스스로를 지우는 상황에서 다시 그 국가권력을 통해 같은 재난을 반복하지 않을 책임을 어떻게 조직화해야 할까.
이태원 이후로도 또 다른 생활과 노동의 공간에서 부당한 희생이 이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어느 한 사건에 집중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 사건들마다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국가의 무능함과 뻔뻔함은 오히려 시민들에게 학습된 무기력을 안기고,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정치문화를 일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만연한 사회적 부정의와 불행을 겪는 타인에게 오래 시선을 둘 수 없고, 분노에 찬 대중의 함성도 어느새 사그라지게 마련이라는 개인들의 생존적 조건이 염치없고 탐욕스러운 정치를 키우는 토대가 될 수는 없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2차세계대전 직후 국가폭력에 관계된 인간들의 죄와 책임을 묻는 <죄의 문제>(이재승 옮김, 앨피)라는 책에서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고 이런 권력관계를 구축하는 투쟁에 나서지 않는 것을 인간의 도덕적 죄, 그리고 세상의 불법과 불의를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끼는 책임을 형이상학적 죄로 명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고 슬픔을 경감하는 노력에 힘을 보태는 것은 서로에게 연루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피할 수 없는 윤리적 의무인 것이다. 타인의 억울한 부고에도 연민을 모르는 각자도생의 시대는 시민들의 저항과 변혁을 두려워하는 부정의한 권력이 바라는 바다.
국가의 부재를 대신해, 연대하고 성찰하는 시민들의 힘 덕분에 국가의 퇴행은 저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개별 시민들이 죄책감을 떠안는 데 머물러서는 안된다. 시민들이 맡겨준 공적 책무를 위반한 자들의 죄의 목록을 제시하며 수치를 안겨주는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수치 주기'(shaming)는 시민들이 규범을 위반한 권력자를 처벌(심판)하는 한 형태다(<수치심의 힘>, 제니퍼 자케). 물론 그동안 행태를 볼 때 수치를 받을 ‘수용체’가 없는 것 또한 그 목록에 포함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시민사회가 가진 규범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그 일환으로 10.29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데 실패한 국가에 그 원인이 있고, 정의와 인권을 본질로 삼는 민주화된 권력관계가 우리 시민들이 바라는 정치임을 널리 알리는 1주기가 되도록 하자. 또한 진상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호도했던 비열하고 야만적인 정치를 드러내고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이제라도 알리며(10.29 이태원참사, 인권으로 다시 쓰고 존엄으로 기억하다), 더 넓은 일상적 공간과 전지구적 차원의 재난에 대해 대비하는 데 함께 하기를 제안한다(1주기 학술대회 “진실과 투쟁 그리고 공동체 회복의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