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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땅의 평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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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한 달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전쟁이 아니라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흔히 전쟁을 보건학적 위기라고도 한다. 살상무기에 의한 직접 피해 뿐 아니라 음식, 물, 에너지, 의료, 주거지 등 생명과 건강 유지에 필수적인 각종 사회경제 인프라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지금 가자지구의 무너진 의료체계가 빚어내는 참상이 여실히 보여주듯이 말이다. 건강권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어떤 명분의 전쟁과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 눈앞에 당도한 압도적 고통 앞에서 깊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른 채 이 문제를 객관화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과 이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회의감이 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알아주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작게나마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역시 서구 강대국의 주류 논리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 참혹한 불의의 현실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연대의 메시지를 어떤 형태로든 발화하는 것. 이것이 고통 받는 ‘동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지난 한 달간 이 사태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배경을 다룬 많은 심층 분석 기사들이 나왔다. 하마스의 야만적 선제공격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서구 강대국들의 비호 아래 행해진 이스라엘의 지배와 억압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 우리가 규탄해야 할 대상은 평화적 공존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시온주의와 반유대주의라는 두 극단적 강경파 세력이라는 데 대체로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전망이다. 이번 기회에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축출하려는 이스라엘 극우파 정권의 계획을 저지하고 휴전을 체결하도록 이끌 만한 수단이 현재로선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개입을 비롯해 인접 중동 국가들의 참전이 이어질 경우 더 큰 인명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이는 반드시 피해야 될 시나리오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면 결국 세계 시민사회의 규범적 힘을 강화함으로써 이스라엘 정부와 패권 국가들을 압박해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범이란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인권이 바로 대표적 규범 중 하나다.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으로 탄생한 국제 인권 규범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전쟁 범죄에 대해 인도주의적 개입을 요구한다. 즉, 규범으로서 인권은 주권 국가라 할지라도 종교와 인종, 민족 등을 이유로 거주민의 기본 인권을 짓밟는 경우 그 주권을 뛰어넘어 이를 막아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유엔 총회에서 ‘즉각적이고 항구적이며 지속적인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됐지만 (물론 한국 정부는 기권했지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제 규범의 허약함을 다시금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규범적 접근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 또는 그 어떤 규범이라도 그 자체에 내재적 힘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규범의 힘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그 가치를 인정하고 공유하고 추구할 때만이 강화될 수 있다. 따라서 통치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 어떻게 하면 더 큰 동의와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지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절박한 과제일 테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좀 더 상세히 규명함으로써 정의로운 평화론의 규범적 우위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살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특정 인물과 세력, 국가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가누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일부 권력자의 결단만으로 평화가 도래하기 힘든 까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량학살의 이면에는 이해관계로 묶여 있는 서구 패권 국가들의 공모가 있다. 대량학살이 가능하려면 그만한 군사 능력과 함께 이를 은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 국가들은 여기에 모두 연루돼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재정적 지원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해고 또는 형사고발하는 방식으로 억압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의 반인도적 공격을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보호하는 것으로 포장하는 패권적 안보 프레임에 편승하기도 한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인도적 지원에 앞장서는 기만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이 이스라엘을 돕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을 핍박한 역사적 원죄를 갚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를 토대로 형성됐다. 즉, 서구 패권 국가들은 약소국과 비백인 인종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때론 집단학살하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며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이스라엘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식민지 팔레스타인을 착취해 왔다.

 

팔레스타인 거주지역 내 ‘정착촌’은 자본주의와 팔레스타인 ‘식민화’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일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좇아 사회복지 서비스 등을 민영화했을 때,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 낮은 사회계층에 대한 보상책으로 이스라엘 정부는 정착촌을 확대하고 정착민에게 주택, 교육, 고용, 의료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무엇보다 경제 체제의 문제에서 기인한 불평등 심화가 좌파 정당의 몰락과 극우파의 장기 집권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지금의 인종청소 프로젝트를 단지 종교나 민족국가 차원만이 아닌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의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찾는 중요한 경로가 될 수 있다.

 

비극적 사태 앞에서 ‘교훈’이나 ‘반면교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의 체제가 극우 정치세력의 발흥과 폭력의 문화를 양산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전 세계 평화 체제를 구상하고 평화의 연대를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아울러 전쟁 중에 웃고 있는 군수 업계와 무엇을 팔았던 수출 증가에만 일조한다면 그저 환영 일색인 우리 사회의 만연한 자본주의적 규범이 어쩌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가로막는 숨은 장애물 중 하나는 아닐지 성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지붕 없는 감옥’에 갇혀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다 이제 인종청소의 대상이 된 사람들. 그 곳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그 고통의 땅으로부터 심리적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으면 온전한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거리감이 클수록 우리는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거리두기를 해제한 채 절망감과 비통함, 분노 등 온갖 불편한 감정을 끌어안으면서 평화를 외치는 이들이 있다. 우리 모두 그만큼 용기를 내기 어렵더라도, 적어도 이들을 향해 ‘인권팔이’, ‘평화팔이’라는 혐오와 냉소를 양산하는 자들과 맞서 싸우는 용기를 내볼 수 있지 않을까. 평화를 갈망하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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