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화요일(2/6) 정부는 마침내 의대 입학정원 확대 계획을 발표했다. 예상보다 큰 규모(2,000명)의 증원 계획에 ‘파격적’이라는 반응이 많다. 또 그만큼 핵심 이해관계자인 의사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2020년에도 의대 증원 계획이 발표됐지만, 의사들의 집단휴진 투쟁에 막혀 철회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팬데믹 국면이 아닐 뿐더러 의대 증원에 대한 압도적 지지 여론이 형성돼 있다는 점에서 그때와 다른 결과가 도출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물론 아직은 결말을 예단하기 이르다. 앞으로 전개될 정책 추진·저항 세력 간의 경합 과정을 비롯해 최종 정책 실행까지 여러 변수가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책의 실현 가능성 여부보다 이번 의대 증원 계획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깊이 따져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의대 정원 확대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그렇다고 정부 계획을 무작정 지지하기 어렵다. 우선 이러한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 그동안 의사 증원 문제는 정부 관료와 의료전문가 위주로 구성된 폐쇄적·배타적 논의구조에서 이뤄져왔다.
일반 시민과 지역주민은 의견 청취의 대상이었을 뿐, 동등한 논의 주체로 참여하지 못했다. 지역·필수의료 공백으로 가장 큰 고통과 피해를 입는 이들이 중요한 정책결정 논의에서 배제된 것은 절차로서의 민주적 공공성을 위배한 것이다.
이는 단지 절차적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의사 증원에 대한 큰 사회적 합의가 형성돼 있더라도 구체적 방식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의사들의 집단 파업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예상되는 정책이었던 만큼 보다 넓고 깊은 사회적 논의와 소통이 필요했다.
일례로 일각에서 제기되는 의사 교육·수련의 질 저하와 이공계 학생들의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 등에 대해 정부가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대안을 준비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번 발표를 놓고 “파격적”, “대승적”이란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그만큼 정책이 정교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면 사회적 혼란과 부작용이 클 수 밖에 없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 정책 추진의 동력도 약화될 터이다. 2020년 의대 증원 계획 때 논평했던 바와 같이(☞관련 논평: 바로가기), 이번에도 역시 정부가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게 아닌지 의심이 간다. 보건의료체계 위기에 대한 정부 역할과 책임을 미루고 회피하는 ‘정치적 효과’가 그것이다.
현실의 고통과 현장의 경험이 강력하게 새로운 보건의료 체제를 요구할 때, 단언컨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이 ‘전가의 보도’로 동원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그 복잡한 정책 개선과 체계 개혁, 엄청난 재정 소요, 예상하기조차 어려운 사회적 갈등 해결 등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만능의 대안으로 소비될 터. (“의대 신설과 정원 확대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나?”, 2020년 7월 27일자 서리풀논평)
우리는 의대 정원 확대가 불러올 ‘착시 효과’를 경계해야 한다. 의사 인력의 충원만으로 지역·필수의료의 위기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정부 역시 의사 수 증가는 ‘필요’ 조건일 뿐이라고 밝혔다. 지역과 진료 과목별로 의사 인력의 분포를 편중·왜곡시키는 구조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2/1)에서 구조 개선으로 제시한 대안들은 대부분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것들이다. 수가 인상과 같은 경제적 인센티브 강화가 그 예이다. 하지만 얼마를 더 보상해줘야 비도시 지역과, 신체적·정신적 부담이 큰 필수의료 업무를 떠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시장적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인력 수급 전략에 대해 많은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시장’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논의는 드문 듯 하다. 우리는 지역·필수의료 위기의 근본 원인은 보건의료체계가 지나치게 시장화·영리화돼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과도한 시장화에서 기인한 문제를 시장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정부 계획에 동의하기 어렵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체계 차원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체계적(총체적) 관점을 토대로 ‘지역’과 ‘필수’라는 부분에서 보건의료 ‘체계(체제)’ 전체의 위기로 문제 인식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시장형’ 보건의료체계 너머를 상상하고 모색하는 가운데 체계의 시장성·영리성 약화, 즉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를 추구해야 한다. 의사 인력의 공급 확대 정책 역시 공공성 강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 기조는 공공성 약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적극 추진 중에 있는 보건의료산업 육성 정책은 체계의 시장성·영리성을 심화시킬 위험이 크다. 대통령의 신년 대담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의대 증원조차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나라 의료 인력 수준이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의료 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나 바이오헬스케어 분야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의대 정원 확대는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한국방송 특별 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2024년 2월 7일)
증원된 의사 인력을 보건의료 산업화를 위해 활용한다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다. 구체적 후속 조치가 나올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만, 대통령의 이 발언만 놓고 보더라도 경제성장을 위해 보건의료를 산업화하려는 통치의 비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니 보건의료 위기도 시장과 산업을 키우는 방식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 필수의료 분야의 의료분쟁 위험이 높다며 책임보험‧공제 가입을 의무화하고 필수진료과에 보험료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은 민간보험시장의 확대 정책이기도 하다.
가장 시장화된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은 가장 많은 의료 소송이 발생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경향들은 불필요한 검사와 치료 증가, 특정 환자·집단에 대한 진료 회피 등 방어진료 관행을 증가시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이 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계획처럼 최소한의 장치인 의무 복무 기간 규정마저 없다면 도대체 뭘 근거로 문제 해결을 낙관할 수 있겠는가. 거듭 강조하지만 의사를 얼마나 늘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공공성 강화에 복무할 수 있는 의사 인력을 어떻게 양성, 배치, 활용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시장화된 의료체계가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면 반시장적 방식으로, 즉 강력한 공적 통제 기전을 전제로 의사 증원이 이뤄져야 한다. 공공의대, 지역의사면허제, 그리고 공공보건의료기관의 확충과 기능 강화 등 여러 대안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 체계의 공공성 강화 관점에서 이러한 대안들을 조합하는 과제가 남았다.
우리는 보건의료체계의 위기 극복은 체계의 시장화를 억제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장의 논리와 방식을 벗어나는 의사 증원과 보건의료개혁만이 우리 모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