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에 열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대통령은 국가 인구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가칭) ‘인구전략기획부’ 신설과 ‘인구위기 특별회계’를 비롯한 각종 범국가적 총력대응 정책들을 발표했다. 이전 정부에서 내놓은 저출생 대책과 다른 점은 위상을 높인 전담부처와 별도예산을 명시하고, 저출생의 직접 원인이 되는 일·가정 양립, 양육, 주거 3대 분야를 집중 지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비상사태라는 진단에 걸맞는 대응책이며, 정부가 집행에 진정성을 보일지 회의적이다. 우선 국회에서 정부조직법상 ‘여성가족부’의 존폐가 정리되어야 부총리급 ‘인구전략기획부’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윤석열정부 출범이후 지속된 여야의 대치 정국을 풀고 다른 모든 일에 앞서 그 합의를 이끌어 낸다면, 정부가 말한 ‘총력대응’의 의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나머지 정책들의 파급력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시민들은 당장 정부의 여러 감세정책 때문에 재원은 마련할 수 있을지, 주거지원정책이 아니라 부동산정책이 아닌지, 아동돌봄시간 연장보다 노동시간 단축이 우선이 아닌지, 성차별 해소 없이 일·가정 양립은 가능한지, 게다가 외국인 유학생과 그 배우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가사 돌봄 취업 기회’를 주는 것이 글로벌 시대정신에 맞는지 묻고 있다.
‘휴대폰이 재미있어서 애를 안 낳는다’거나 ‘여아 조기입학으로 저출생을 해결한다’는 정부기관의 발표가 거센 비판과 조롱을 받았던 것이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았다(관련기사1, 관련기사2). 과연 한국의 인구정책 결정권자들은 저출생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고,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은 있는 것일까? 이런 발표가 연이어 나온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능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비상사태가 어제처럼 오늘도 이어지고, 오늘보다 내일 더 심해져서 결코 ‘저출생 추세 반전’이라는 대통령의 목표를 이루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딴 수가 없으니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고, 없는 것보다는 이런 지원 정책이라도 나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다 같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고 머리를 맞대고 애쓴다기보다, 형편이 더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지원정책의 수혜를 입고 사정이 어려운 누군가는 희생하고 곤란한 삶을 견디라고 하는, 더욱 강고한 불평등의 체제화를 비상사태의 해법으로 삼는 데 동의할 수는 없다. 당장 단기 육아휴직 도입과 육아휴직 월급여 상한 인상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책은 공허하다 못해 좌절감까지 준다. 노동시장, 젠더 등 구조적인 사회불평등을 직격하지 않는 대책은 이미 우리가 수없이 경험한 바,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인구정책은 출생정책을 넘어선다. 인구정책은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일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전 과정에 대한 사회정책들의 총합으로, 국가의 책무성이 전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국가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축소하고 그것을 시민들에게 돌림으로써, 생애과정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을 개인이 극복할 과업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권력은 그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돌봄과 노동에 대한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불리함을 전면적으로 갱신하지 않고도 실현가능할 것 같지 않은 정책들로 면피 중이다. 이런 통치 전략의 성공 여부는 ‘정부 역시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라는 담론의 보편화 정도가 좌우하는 바, 문제 해결의 책임을 내면화한 주체가 얼마나 생산되었는가가 결정한다.
그렇다면 정부의 저출생 극복 정책이 단편적이고, 역부족이어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한가? 고디언의 매듭(Gordian knot)을 잘라내는 영웅을 기다리며 문제를 외재화하는 것은 책임의 내면화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저출생 현상은 개인들의 보편적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은 사회적 실천이자 문화가 되었다. 이는 교육, 노동, 주거, 지역, 젠더 등 모든 삶의 조건에서의 불평등과 위기의식에 기반한 사회구성원들의 개별적이면서 집합적인 수행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여전히 저출생을 경제·성장·국력·노인 부양의 위기로만 호출하며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구조적 모순을 비껴가고 있다(서리풀논평 바로가기). 점점 더 많은 개인들이 생존과 친밀성의 공동체로서 유지해 왔던 가족이라는 오래된 시스템에서 떠나기를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와 시민들의 새로운 필요에 반응하기보다, 국가권력과 총자본은 ‘국가존망의 위기’라는 역사적 국면으로 전환하여 통치의 존속을 도모하고 있다.
저출생이 불평등과 위기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저항이자 결단이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정책당국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출산과 인구전략이라는 연상의 고리를 끊어야만, 여성의 삶을 출산과 양육에 맞춰 쉽게 바꿀 수 있다는 도구적 인식을 중단해야만, 각자의 삶을 보호하고 더 나은 선택을 넓히는 방법으로서 저출생을 넘어선 인구정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의를 제안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적 재생산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돌파하지 않는 한, 그것을 피해가는 복잡하고 우스운 방법들로는 저들이 말하는 비상사태도, 우리 삶의 위태로움도 해결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하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민주적이면서도 공공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실천, 그래서 현실과 미래의 사회구성원들이 자기 삶에 대한 결정의 실질적 주체가 되기 위한 역사적 실천. 이런 투쟁과 실천을 함께 할 것을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