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제2의 새마을운동이 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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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0일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 말한 내용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정신 혁명’, ‘의식 개혁’, ‘문화 운동’과 같은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 ‘공동체’를 언급한 것도 허투루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새마을운동이 ‘부활’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 새마을운동을 수출한다는 것은 이미 이번 정부의 기본 방침이 된 지 오래다. 안전행정부가 나서서 전세계로 ‘전파’할 것을 공표했다.

아직은 새마을운동의 부활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데, 지붕 개량이나 농로 포장 같은 ‘삽질’이 웬 말이냐고 말한다. 나아가 의식 개조니 정신 운동까지 말하면 냉소적 반응이 대부분이다.

이것으로 무얼 해 보려는 쪽으로서는 고민이 클 것 같다. 아무리 새롭다고 포장해도 박정희 시대와 유신, 개발 독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라도, 그리고 스스로 내세우는 대로, 다른 형태의 ‘국민운동’이 될 공산이 크다.

겉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을 추진하는 내면의 동력과 구조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새마을운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왜 하고 싶어 하는가?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원조’ 새마을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선, 농민들의 생활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을 꼼꼼하게 분석한 역사학자 김영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을 국가가 주도하는 근대화 전략과 대중동원체계라는 두 축으로 파악했다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 운동>, 푸른역사, 2009). 앞은 그렇다 치고, 뒷부분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

“새마을운동이 농촌근대화운동을 넘어선 박정희 정부의 종합적 지배전략이라고 했을 때 운동의 수행 주체인 농민들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동원된 주체들이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의 국민운동은 대중들을 정치적 목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 대중동원 메커니즘이다.” (336쪽)

같은 분석이 지금도 유효한지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이런 시각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제2의 새마을운동이 단순히 개인적 회고와 ‘응어리’의 차원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소중한 깨우침이다.

특히 대통령이 강조한 정신, 의식, 문화, 공동체와 같은 말들은 의미심장하다. 말들이 낯설지 않아서 더 그런 지도 모른다. 사실 이는 과거 새마을운동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기억을 되살려보자.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농가의 소득배가 운동이었지만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도시, 직장, 공장 새마을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근면, 자조, 협동을 강조하는 의식개혁 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50대 이상의 연배에서는 이 익숙한 새마을운동의 구호를 지금도 술술 말할 정도다.

새로 말하는 의식개혁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통령이 말했다는 “나눔, 봉사, 배려의 실천적 덕목을 더해 국민 통합을 이끄는 공동체”도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애써 새마을운동을 되살리려고 하는 것을 우연 또는 회고로 돌릴 수 없다는 점을 되새긴다. 단순한 정치적 유산으로만 보기에는 이익 못지않게 손해 또한 감수해야 할 형편이다. 좀 더 근본적인 동력이 있지 않고서는 현실의 적극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지배전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사실 과거 대부분 정권이 시도한 여러 ‘국민운동’들이 같은 맥락에 있다). 오래된 부대에 새 술을 담는다고 할까.

관심을 둘 것은 ‘자조’라는 (오래된) 새마을운동의 핵심 구호이다. 다시 김영미의 분석을 보면, 새마을운동 자체가 바로 자조를 강조하는 데서 출발했다. 1970년 4월 22일 지방장관회의 자리에서 대통령이 처음으로 ‘새마을가꾸기 운동’을 언급했고, 자조는 이 연설의 핵심을 차지한다.

자조가 농민들을 깨우치려는 계몽의 가치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근면이나 협동이 도구적이라면, 자조는 다분히 이념적이다. ‘스스로’라는 뜻이 말하듯, 이는 사회철학이자 ‘관(觀)’으로서의 ‘개체주의(개인주의)’와 직접 연결된다. 개인주의의 핵심 내용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개인과 개체는 고유하고 독립된 존재로 스스로의 가치와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개인이 사회와 집단보다 중요하며 외부로부터의 간섭이나 개입은 적을수록 좋다. 책임과 자조는 이러한 개인의 독립성을 지키는 중요한 가치다.

물론 과거의 새마을운동이 국가동원체제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새로운 운동에서도 동원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 점에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동원이 국가적으로 제도화된 것과는 달리 그것의 이념적 기반은 존재론적 개인주의와 사회적 다윈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마을운동에서 경쟁과 차별적 지원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신-구 새마을운동의 이념적 친화성은 처음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새마을운동의 동원 전략이 신자유주의와 그리 멀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또한, 정책적으로는 많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기에 대응하는 공통적인 방법과 맞닿아 있다. 국가와 사회적 책임은 가능한 한 줄이면서 부담을 개인화 그리고 민간화 하는 방식.

이런 전략이 현실과 부닥치는 현장이 보건과 복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또 다른 관심사다. 개인과 공동체, 사회, 국가가 긴장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면 이보다 더한 분야를 찾기 힘들다. 빠르게 증가하는 비용 때문에라도 체제를 흔드는 위기의 직접 원인이 된다는 점도 보태야 한다.

새마을운동과 보건-복지는 진작부터 이런 긴장관계를 품고 있었다. 1979년 10월 8일부터 10일 사이에 경주에서 <새마을운동과 주민복지연찬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논의되었던 새마을운동이 뜻하는 것, 그리고 의도하는 것은 이랬다.

“『우리 마을의 보건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고 우리의 건강은 우리가 지키겠다』는 지역사회의 자조적이고 협동적인 정신과 아울러, 이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일차보건·의료』사업을 전개시켜 나간다면 고도의 복지정책이 경제성장의 파탄을 초래한 몇몇 선진국의 전철을 밟지 아니하고도 훌륭한 복지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기초였다 (연찬회 보고서, 5-6쪽).

“주민복지는 서구에서 볼 수 있는 협의의 복지 즉 국가에 의한 사회보장제도와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민복지는 이보다 광의로 이해됨은 물론 「국가에 의하여 받을 수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야 하며, 오히려 후자에 높은 비중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찬회 보고서, 28쪽)

놀라운 일이지만, 35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어 지금 것이라 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제2의 새마을운동이 갖는 기반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새로운 새마을운동의 본질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 정부가 충실하게(?) 새마을운동을 되살릴 때 선택할 보건복지의 기조는 분명해 보인다. 지역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스스로 돕기(자조)가 핵심이 될 것이다. 결국 보건과 복지의 탈-사회, 탈-공공, 민영화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보건복지에 관한 한, 새마을운동 전략의 한계는 워낙 뚜렷하다. 신자유주의의 한국판 ‘신장개업’은 시대착오가 되기 쉽다는 뜻이다. (개인, 가족, 지역, 공동체) – (자조, 협동, 봉사) – (의식, 정신, 문화,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패키지가 ‘지배전략’이 되기에는 힘에 겹다.

정치적 기반 때문에라도 스스로 포기하지는 못할 터, 대항하는 힘을 키워야 착오를 바로잡을 수 있다. 모순에 따른 긴장과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신 혁명과 의식 개혁이 아니라 공공성과 민주주의, 그리고 연대가 사회적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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