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시민건강논평

진료받을 기회와 양질의 의료서비스의 박탈, 건강할 권리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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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월 정부가 일방적으로 2,000명 의대증원을 ‘선포’하고, 이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집단 이탈한지 꼬박 1년이 지났다. 의정갈등이 촉발한 환자들의 피해, 병원 노동자들의 고충, 비수도권지역 의사수급 난항, 의대교육의 파행 등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분노할 일은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의료개혁’을 강행하며 사람들을 사망과 질환의 고통에 몰아넣고 있는 끔찍한 현실이다. 의료공백 초기 6개월간 초과사망자 3,136명은 말 그대로 의정갈등이 없었으면 살아남았을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도 환자들은 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맞지 않을 죽음에 이르거나 진단을 받고도 필요한 수술을 제때 받지 못할까봐 마음 졸이고 있다.

 

그러나 여태껏 정부는 스스로 초래한 이 엄중한 공중보건의 위기를 수습할 의지도 역량도 보여주지 못했고, 정책이 초래한 혼란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모든 진료영역에 적정한 숫자의, 잘 훈련된 의사인력을 공급하고, 시민들이 거주지나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을 이유로 의료서비스 이용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책무이다. 1년이 지나도록 온갖 문제를 키우다가 급기야 2026학년도 의대 증원 규모를 각 대학이 ‘100% 자율’ 로 결정하라는 발표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고한 수많은 죽음과 아픔에 대하여 상징적이나마 사과하고 물러나는 이도 한명 없는 것인가.

 

보건의료체계에서 의료인력이 중요함은 당연하지만, 예비 의사인력부터 현직에 있는 의사들까지 ‘의대증원 논의는 오로지 의사집단이 주도해야 한다’며 ‘전면 백지화’ 만을 내세우는 것에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논평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사회적 필요에 대응하기 위한 자원 수급정책으로서 의료정책의 결정권한은 의료전문가와 관료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더 넓은 당사자 시민들과 진보적 연구자들에게도 있다. 지금처럼 의료계가 일체의 사회적 논의를 배척하고 사회적 특권과 경제적 보상을 독식하는 권력집단으로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할 경우, 의사증원의 필요에 공감하는 많은 시민들로부터 고립될 수 밖에 없다.

 

환자와 병원 노동자들의 피해

 

의정갈등의 두 축인 의료계와 정부의 발언과 행위에만 관심이 쏠리는 사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환자들과 병원노동자들의 피해, 그리고 지역 보건의료체계의 붕괴는 덜 조명되고 있다. 최근 시민건강연구소가 전공의 이탈 후 병원 현장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환자들의 초과사망과 진료지연의 원인 그리고 병원 간호노동자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이 잘 드러났다(관련기사).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환자의 응급수술과 진료가 어려워졌고, 중증환자의 예정된 수술이 취소되거나 입원 대기기간이 길어지고, 수개월에서 1년 가까이 외래예약도 연기되고 있다. 응급상황에서도 먼 지역의 병원을 찾아 헤매야 하고, 운 좋게 입원한 환자들이라도 검사나 처치가 지연되어 재원 일수가 증가했다. 환자들은 병원들이 수익을 늘리기 위해 처방한 비급여항목 진료를 받았지만, 막상 교수의 회진이 줄어들면서 본인 상태에 대해 상담도 어려워 제대로 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의료현장에서 환자안전사고도 증가하였다. 간호사들은 체계적 교육이나 명확한 업무범위에 대한 지침도 없이 전공의 업무에 투입되었다. 또한 이들은 환자에 대한 담당의사와의 직접적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구두처방과 대리처방을 하고 있다. 간호사들의 1인당 담당 환자수와 환자 중증도는 증가했지만, 동료 근무자와 지원인력은 줄어들어 업무 과중과 고강도 노동에 내몰려있다. 이와 함께 진료지원 간호사와 일반간호사 간, 의사와 간호사 직군간의 이해와 신뢰가 낮은 조직 내 문제도 겹쳐 있다.

 

대리처방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무서워요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는 범위인가?”

명확한 업무 경계가 없어 병동내 근무인원끼리 충돌이 잦습니다

전공의 업무, 애매한 업무 모두 간호사에게 떠맡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짧은 대답 속에 병원 현장의 위급함이 담겨 있다. 이로 인한 의료사고나 병세 악화는 누구의 책임인가? 게다가 병원에 남은 펠로우와 담당교수들의 예민한 상태를 신경쓰고, 병동 환자나 보호자들의 불만과 고충을 받아줘야 하는 추가적인 감정노동 역시 간호사들의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급휴가나 임금동결로 사실상 실질임금이 감소했지만 고용불안이 겹쳐 악화된 노동조건을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역 보건의료체계의 침식

 

서울은 타 지역에서 유입되는 환자 비중이 높고, 특히 빅5로 불리는 병원들로 환자와 진료비가 집중되는 문제는 거듭 지적되어 왔다. 빅5 병원을 찾는 비수도권지역의 환자(진료실인원)는 2013년 50만 245명에서 2022년 71만 3,284명으로 꾸준히 늘었고, 2024년 상반기에만도 99만 4,401명에 달했다(같은 기간 진료비는 각각 9,103억원, 2조 1,822억원, 1조 5,602억원).

 

병원들의 진료가 축소되었다고 한 2024년 상반기에도 서울로 원정진료를 오는 환자 숫자와 진료비 규모가 이 정도라는 것은 전공의 이탈의 피해가 비수도권 보건의료기관에는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뜻한다. 비수도권 대학병원의 경우 전공의 이탈 사태 이전부터 의사인력의 수도권 쏠림현상 속에서 전공의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사직 전공의들을 대체하기 위해 수도권 대학병원들이 채용공고를 내면서 지역에서는 의사를 구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심지어 지방 국립대병원의 교수와 전문의들도 사직하고 수도권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에만 국립대병원 교수 223명이 사직하였다(관련기사).

 

의정갈등이 시간을 끌수록 지역의 보건의료체계가 약화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전폭적인 인력과 자원이 조속히 투입되지 않는다면, 지역보건의료체계의 대응력과 이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부와 의료계는 의대증원논의에서 지역의사제, 공공의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않고 있다. 공식통계에 나타난 진료비 외에도 비급여 고가진료, 상경 진료에 따른 추가적인 지출을 고려하면 지역의료의 부실화와 격차는 지역사회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삶을 지속하는 근간을 침식시켜 공동체의 소멸을 앞당기는 큰 원인이 된다.

 

“어디까지 이기적일 것인가”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을 대신하고 있는 현장에서 묻고 있다. 정부 당국과 의료계는 서로를 설득하지 못하는 증원 계획과 전면 백지화 주장으로 언제까지 이 파국을 밀고 나갈 것인가. 환자들의 위태로운 삶, 진료 현장에 남아 있는 의료인력들이 감당하고 있는 고된 책임들, 점점 부실해져 가는 지역보건의료체계,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된 이 사태에 대해 정부와 의료계 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가 대책을 찾는 일을 미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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