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이 놓친 시간, 그들이 살아낸 통찰의 시간
권정은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최근 들어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의 진단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관련기사: 바로가기1, 바로가기2). 한편에서는 급격한 수요 증가로 ADHD 치료제 공급 부족 사태가 심각해지며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야기하고 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특히 ADHD는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혹은 ‘이상한’ 행동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의료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의료화된 질병의 대표주자로서, 과잉 진단될 우려가 높다는 지적을 받아온 바 있다.
오늘은 이스라엘에서 성인이 된 이후에 ADHD 진단을 받은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의학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조기(아동기) 진단 모델에 문제를 제기하는 한 논문을 소개하고자 한다(☞논문 바로가기: “나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성인기 ADHD 진단에 대한 의학적·문화적 이상 재고). 기존의 정신의학 담론에서는 ADHD를 아동기에 주로 발병하는 질환으로 정의하며 진단이 늦을수록 문제적인 경우로 간주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성인기 ADHD 진단자(midlife-ADHDers)들의 관점에 주목하여, 지연된 진단이 오히려 연구참여자들의 깊은 자기 이해와 창의적 대처 방법의 개발에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정신의학이 ‘지연’이라고 규정한 이 시기가, 오히려 이들에게는 창조적인 자기 형성의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성인기 ADHD 진단자들은 단순히 진단과 처방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의료 규범에 저항하는 주체이다. 이들은 진단 이전의 시기를 결핍이나 실패의 시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아동기에 조기 진단을 받았다면 억압되었을 자율성과 회복력을 키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진단 없이 살아온 시간 동안 개인적 지식, 대응 전략, 고유한 주체성을 형성해왔으며, 이것이 현재의 자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말한다. 기존 제도나 의료 시스템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체적으로 삶을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질병을 보는 전통적인 의료 관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ADHD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성인기에 ADHD 진단을 받은 연구참여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진단 없이 살아오며 다양한 개인화된 대응 전략을 개발했다. 이 전략들은 의료적 조언보다는 오랜 경험과 신체 감각, 일상의 실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진단 이후에도 이들은 의료적, 제도적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몸과 삶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치료와 약물 사용을 스스로 조절하는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메니(45세; 진단 시 31세)는 ADHD를 “한 번에 여러 사람이 된 것 같은 선물을 받은 느낌”이라고 설명했고, 벤자민(61세; 진단 시 50세)은 이를 “크든 작든 모든 걸 볼 수 있는 ‘떠다니는 마음’을 가진 거죠”라고 표현했다. 론은 일명 ‘스트레스 볼(손에 쥐고 조작하며 스트레스 해소나 근육 긴장 완화에 도움을 주는 장난감)’을 들고 다니며 필요한 상황마다 책상 아래에서 주무르며 집중(하는 척)을 했다. 리오라(47세; 진단 시 35세)도 역시 “작고 형태가 변하는 장난감”을 항상 들고 다닌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시간을 ‘경험적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정해진 연령 기준에 따라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지는 ‘사회-의료적 시간’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경험적 시간은 표준화된 의료적 시간표와는 달리 개인의 삶의 리듬과 사회적 환경 속에서의 고통과 회복을 조망하는 시간이다. 경험적 시간은 개인이 병이나 다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이 차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탐구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개념화함으로써 연구자들은 정신질환의 진단을 선형적인 시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유연하고 다층적인 접근을 제안한다.
특히 성인기 ADHD 진단자들은 낙인을 극복하고 규범을 재구성하며 살아왔다. 이들은 진단 이전의 삶에서 ‘문제아’ 혹은 ‘부적응자’로 간주되며 낙인과 배제를 경험했지만, 이러한 경험이 오히려 사회비판적 인식과 자기 방어 전략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일부는 어릴 때 진단을 받았다면 사회적 규범에 억눌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ADHD에 대한 이들의 서사는 정상성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또한, 이 논문은 젠더화된 ADHD 진단의 문제도 지적한다. 과잉행동이나 충동성과 같은 ADHD의 외현적 증상은 대개 남성에게 연결되며, 여성에게 더 자주 나타나는 주의산만이나 공상 등의 비가시적 증상은 간과되기 쉽다. 이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진단 없이 살아오거나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여기며 고립되어 왔다. 물론 이 연구의 목표는 ADHD 진단의 젠더 격차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젠더화된 진단 구조를 통해 ADHD가 단지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은 성인기 ADHD 진단자들이 의료 시스템 밖에서 개발한 자기 지식과 돌봄의 전략을 보여준다. 이들은 의사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와 몸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약물 사용을 자신에게 맞게 조절하거나, 신체적 움직임, 내면 대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스스로 조율했다. 이러한 실천은 자신의 몸과 고통에 대한 체화된 지식을 존중하는 것이며, 전문화된 의료 지식을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정신의학적 진단이 단일한 시간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진단의 ‘적절한 시기’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다. 또한, 연구참여자들의 경험은 삶에 대한 주체적 이해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인의 경험과 지식이 의료 현장에서 더욱 존중받아야 함을 보여준다. 성인기 ADHD 진단자들은 진단의 지연을 실패가 아니라 자기 이해와 창의성, 사회 규범을 재정의하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며 정신의학적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는 사람중심적인 정신건강 돌봄 모델을 구상하는 데에 통찰을 제공해준다. 물론 적절한 의료적 진단과 약물적 개입은 정신건강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증상 개선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내용과 같이 당사자의 관점에서 ‘좋은 삶’이 무엇일지 생각할 때, “전문가”의 진단과 개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항상 좋은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성급한 의료적 개입 이전에, 우리는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일상 속의 다양한 대응 방법을 모색하면서, 획일화된 정상성에도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 서지정보
Tal, L., Goodman, Y.C. “For Me, ‘Normality’ is Not Normal”: Rethinking Medical and Cultural Ideals of Midlife ADHD Diagnosis. Cult Med Psychiatry 49, 183–204 (2025). https://doi.org/10.1007/s11013-023-09825-5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