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doi.org/10.23419/CHES.2026.06.30.38
김태현
(시민건강연구소 사회정신건강센터장)
I. 기존 대응 방식의 한계: 개인화된 정신건강 담론
오늘날 디지털 전환, 유연근무, 플랫폼 경제는 노동자에게 전례 없는 시공간적 자율성을 약속한다.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서사는 현대 노동을 해방시킨 새로운 기술적 성취로 각광받고 있다. 2026년 현재 글로벌 긱 이코노미(Gig Economy) 시장 규모는 약 1조 1,500억 달러에 달하고, 2030년에는 2조 2,5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 종사하고 있는 긱워커 규모도 2020년 705만 명에서 2024년 869만 명으로 165만 명(23.4%) 늘었다(이지완, 2026).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지난 10년간 웹 기반 플랫폼 노동이 3배 이상, 지역기반 플랫폼 노동이 10배 이상 증가하는 등 관련 노동시장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단순한 경제적 팽창에 그치지 않고, 플랫폼 매개 노동이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고용 형태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문제는 새로운 고용형태가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노동자에게 남기는 어두운 징후 역시 개별 사건으로 다룰 수 없는 집단적 규모로 누적된다는 점이다. 가장 뚜렷한 지표 중 하나가 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좀처럼 노동 조건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원인을 개인의 심리적 취약성으로 환원하는 설명 방식이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1940년대 미국 대기업을 중심으로 시행된 알코올 중독 프로그램(Occupational Alcoholism Program)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프로그램은 이후 1970년 연방정부의 ⌜알코올 남용 및 알코올 중독 예방·치료·재활에 관한 종합법(Hughes Act)⌟을 거치며, 직원 지원 프로그램(Employee Assistance Program, EAP)으로 제도화된다. 이 과정에서 EAP는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기업의 생산성 저하 및 개인의 행동, 심리적 역량의 문제로 프레임화하고, 전문가 중심의 임상적 평가와 상담치료와 같은 단기 개입을 조직 관리의 표준적 대응으로 확립했다(Masi, 2011). 이와 같은 개인화 접근은 학술 담론 내부에서도 재생산됐다. 셀리그먼(Seligman)의 PERMA 모델이나 루턴스(Luthans)의 심리적 자본(Psychological Capital) 개념으로 대표되는 긍정심리학 계열의 회복탄력성 연구들은 노동자 정신건강의 해결책을 개인의 내적 자원 축적에서 찾는 지배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이는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결합하여 구조적 불평등을 심리적 결핍 문제로 치환하는 효과를 낳았다(Illouz & Cabanas, 2021). 이러한 성격의 연구들은 조직심리학 및 경영학계에서 주류로 자리하고 있으며, 단순한 학문적 경향을 넘어 기업 인사관리 실천과 정책 담론을 구조화하는 헤게모니적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흐름은 오늘날 디지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직원 복지 프로그램(Employee Wellness Program)이다. 구글, 메타 등 플랫폼 자본을 선도하는 빅테크 기업들은 명상 앱 구독권 제공, 심리상담 바우처, 마음챙김(mindfulness) 등을 복지제도로 도입하며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응하는 듯한 외양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웰니스 담론은 정신건강 위기의 원인을 개인의 회복탄력성(resilience) 부족에서 찾으며, 구조적 노동 조건의 개선 대신 개인의 자기관리 역량 강화를 해법으로 제시한다(Stark, 2024). 정신건강 위기를 생산하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개인의 책임으로 관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결국 기업의 웰니스 제도와 학술 담론은 서로를 강화하며 동일한 개인화의 논리를 여전히 재생산하고, 정신건강 위기를 생산하는 구조적 조건을 은폐하는 효과를 낳는다. 즉, 지금과 같은 개인화된 정신건강 접근으로는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II. 디지털 노동의 구조적 취약성: 왜 더 깊이 병드는가
플랫폼 경제의 확산과 함께 부상한 디지털 노동자들은 기존 노동자와 다른 방식으로 정신건강 위기에 노출된다. 이들의 취약성은 단순히 노동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 형태, 통제 방식, 비가시성 문제가 중층적으로 결합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우선, 디지털 노동자의 상당수는 독립 계약자 혹은 비정규직 형태로 고용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율적 사업자로 분류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플랫폼 알고리즘이 설정한 작업 지시와 평가 체계에 종속된다. 이 같은 고용 관계의 법적 모호성은 이들을 노동법의 외부에 위치시키며, 산재보험, 실업급여, 최저임금 보장 등의 안전망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한다. 캐나다 노동자 7,381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플랫폼 의존적 노동자들은 임금 노동자나 전통적 자영업자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은 수준의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고, 재정적 어려움이 고통 수준의 50%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Glavin & Schieman, 2022). 이러한 결과는 그들의 불안정한 고용 환경이 정신건강 악화 위험을 얼마나 크게 높이는지를 말해준다.
둘째, 디지털 노동자는 조직의 가시적 공간 바깥에 투입된다는 점에서 비가시성을 특징으로 한다. 배달 라이더, 플랫폼 종사자, 원격 프리랜서 등은 물리적 사무 공간을 공유하지 않으며, 노동 과정에서 안전 감독과 심리적 지지 모두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태에 놓여져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관리자의 책무성 부재다. 알고리즘 관리 외에도 교육의 외주화, 평가 책임의 고객 위임 등의 방식을 통해 관리자의 책무성을 축소하고, 노동자가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경로를 갖지 못한 채 계정 정지, 임금 미지급 등의 상황에 노출되더라도 독립적 감독 체계 없이 방치된다.
셋째, 디지털 연결성이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디지털 노동자에게는 인지 자원의 만성 소진(exhaustion) 구조가 형성된다. 수요가 발생하는 순간 즉시 반응해야 하는 상시 대기상태를 유지하도록 알고리즘이 유인되며, 이는 노동자의 주의와 인지 자원을 지속적으로 묶어두는 효과를 낳는다. 대만의 위치 기반 플랫폼 노동자 487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알고리즘을 통한 노동 통제의 강도가 높을수록 번아웃과 정신건강 악화 위험이 유의미하게 증가한다는 결과가 제시된 바 있다(Cheng et al., 2024).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고갈이 단순한 과로의 결과가 아닌 구조적으로 설계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칼 래트너(Carl Ratner)의 거시문화심리학(Macro Cultural Psychology)에 따르면, 인간의 심리적 기능과 정신건강은 고립된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으며, 사회적 기구(Institutions)와 문화적 개념(Concepts)에 의해 형성된다. 여기서 사회적 기구가 사회 구조와 제도라면, 문화적 개념은 그 구조를 정당화하고 내면화하게 만드는 주관적인 인식과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스마트폰과 플랫폼 알고리즘이라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문화적 인공물(Artifacts)을 통해 개인의 일상 행위 양식을 규정하며, 개인의 인지와 정서를 끊임없는 불안과 경쟁이라는 자본의 요구에 맞게 구조화함으로써 개인의 심리적 현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즉, 디지털 노동자가 경험하는 심리적 소진은 독립된 개인의 취약성이 아니라 디지털 자본주의가 인간의 주체성과 심리 체계를 자본의 논리로 구조화하고 체화한 결과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디지털 노동자의 정신건강 위기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생산한 모순의 산물이다. 자율성을 약속하며 포섭하고, 유연성을 내세우며 착취하는 체제의 내적 모순은, 개인의 회복탄력성이나 임상적 개입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
III. 권력으로서의 디지털 노동자 정신건강
앞서 살펴본 디지털 노동자의 정신건강 위기는 단순히 노동 환경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 노동 조건을 설계하고, 누구의 관점이 지식으로 인정받으며, 누가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결정하는가. 이 질문들이 정신건강 위기의 핵심에 놓여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이안 퍼거슨(Iain Ferguson)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정신건강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정치경제체제, 즉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이 관점에서 정신적 고통의 완화는 착취와 억압의 구조가 해소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를 단순한 이념적 주장으로 볼 수 만은 없다. I장에서 검토한 개인화된 웰니스 담론과 II장에서 언급한 구조적 취약성을 연결하면, 현재의 정신건강 위기는 자본주의적 노동 체제가 생산한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플랫폼 자본이 행사하는 권력은 단순한 고용 권한을 넘어선다. 오늘날 빅테크 기업들은 이른바 인프라 권력(infrastructural power)을 통해 노동자의 일상적 행위 양식을 설계한다(Graham, Muldon & Cant, 2025). 알고리즘이 작업의 배분, 평가, 보상을 결정하고, 플랫폼이 노동자 간 소통 경로를 통제하며, 앱이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를 허문다. 이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다. 이때 기술은 더 이상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이윤과 확장, 지배의 논리를 담은 사회적 힘이고, 이를 만든 이들의 이해관계와 권력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현재의 AI 발전을 주도하는 주체는 수익 극대화의 논리로 움직이는 소수의 거대 기업들이며, 이 구조 안에서 대다수의 노동자는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을 갖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AI 기반 관리 시스템은 노동자 감시와 성과 측정을 더 정밀하게 만들고, 알고리즘의 불투명성이 이의 제기 자체를 원천 차단하면서 이 구조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 불균형은 지식 생산의 영역에서도 확인된다. 페미니스트 관점 이론(feminist standpoint theory)은 지식이 역사적 맥락과 무관한 보편적·중립적 산물이 아님을 논증한다(Smith, 1974). 오히려 기존의 과학적 지식은 사회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집단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반영하는 경향이 있고, 이에 맞서는 과정에서 소외된 집단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론적 위치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Graham, Muldon & Cant, 2025). 이 관점을 디지털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에 적용하면, 현재의 지배적 담론—긍정심리학, 회복탄력성 연구, 기업 웰니스 프로그램—이 실제로 고통받는 이들의 경험이 아닌, 자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관점에서 생산된 지식임이 드러난다.
집단적 대응의 가능성 역시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114차 국제노동기구(ILO)총회에서 플랫폼 노동자의 권리와 보호를 위한 <플랫폼 경제에서 양질의 노동에 관한 협약>을 최초로 마련했다. 노동권 없는 디지털 경제에 맞선 역사적 진전이라고 평가받는 성과임에도, 플랫폼 노동 협약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가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박다해, 2026). 제도적 돌파구가 열리는 순간에도 국가 행위자의 의지가 변수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집단적 대응이 얼마나 중층적인 권력 지형 위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에 반해 디지털 노동자의 조직화는 구조적으로 억제되어 있다. 이들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지 않고, 고용 관계는 법적으로 모호하며, 플랫폼 공급망의 극단적인 불투명성은 투쟁의 대상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자신이 실질적으로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집단적 저항은 방향을 잃기 쉽다. 그럼에도 노동단체, 시민사회, 연구자들의 연대를 통해 불투명한 네트워크를 가시화하려는 시도는 플랫폼 자본의 일방적인 통제 구조에 지속적인 균열을 내고 구조적 한계를 규명하기 위한 대항 권력의 형성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VI. 결론
결국 디지털 노동자의 정신건강 위기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세 층위의 전환이 동시에 필요하다. 첫째, 정신건강 담론의 전환—개인의 회복탄력성이 아닌 구조적 조건을 분석 단위로 삼는 연구 패러다임의 확장. 둘째, 지식 생산의 전환—권력에 취약한 이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연구 실천의 강화. 셋째, 권력 관계의 전환—플랫폼 자본의 인프라 권력에 맞서는 집단적 조직화와 제도적 규제의 병행. 이 세 가지 전환이 맞물릴 때, 디지털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정신건강 위기를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는 틈이 생길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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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 D. E. (1974). Women’s perspective as a radical critique of sociology. Sociological Inquiry. 44(1):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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