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4년 5월 7일자 <건강렌즈로 본 사회> (바로가기)
경주 마우나오션 리조트 붕괴 사고로 많은 이들이 황망해한 것이 불과 두달 전이다. 그 슬픔과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 지켜보는 시민들의 가슴이 이리도 아프고 화가 나는데, 사망자나 실종자의 가족들, 그 악몽의 순간을 겪은 생존자들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싶다. 시간이 흐르면 신체적 외상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지겠지만, 심리적 외상의 후유증은 이후로도 상당 기간, 어쩌면 세상의 통념보다 더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미국 제임스 피터스 재향군인 의료센터의 러너 연구팀은 <심리신경내분비학회지>에 심리적 외상,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장기 효과와 관련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2차 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서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생존자와 이를 겪지 않은 유대인의 자녀 95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측정했다. 이들의 혈액과 소변을 채취해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알려진 글루코코르티코이드의 농도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성을 평가했다. 스트레스 호르몬의 반응이 지나치게 활성화되거나 저하되면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은 장기적으로 대사증후군 같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며, 저하된 반응은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분석 결과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어머니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견줘 스트레스 호르몬의 민감성이 크게 증가해 있었다. 반면 아버지가 홀로코스트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자녀는 일반인에 견줘 오히려 민감성이 더 낮았다. 연구팀은 이런 성별 차이를 적응 과정의 차이와 이 때문에 달라지는 가족 관계나 양육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했다.
부모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자녀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홀로코스트 말고도,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대학살이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서안 등 이스라엘 점령지의 국가폭력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자녀한테 건강 문제가 있다는 보고가 이미 있다. 초기 연구들은 외상에서 비롯된 양육 문제나 가족 갈등이 주요 요인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심리적 외상의 경험이 단순히 심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직접적으로 유전 물질에도 영향을 끼치고, 이를 통해 후대에까지 그 부정적인 영향이 계승된다는 증거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연구 결과는 세월호 침몰 사고 생존자들과 사망 또는 실종된 이들의 가족들한테 상당히 지속적인 의학 및 심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 때 정부는 ‘우리 민족한테는 고난 극복의 유전자가 있다’고 광고했다. 그러나 고난 극복 유전자 따위는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 또는 심리적 외상을 겪었을 때, 이를 힘들게 이겨냈을 때, 우리 몸에 남는 것은 신경내분비 조절 기능의 대혼란과 유전물질의 변화를 통해 자녀들에게까지 전달되는 부정적 영향뿐이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지금 피해자들에게 적절하고 지속적인 의학 및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는 일이 시급하다. 물론 책임 소재를 밝히는 일도 중요하다.
박지은 시민건강증진연구소(health.re.kr) 영펠로
*본문에 소개된 논문의 서지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Lehrner A, Bierer LM, Passarelli V, Pratchett LC, Flory JD, Bader HN, Harris IR, Bedi A, Daskalakis NP, Makotkine I, Yehuda R. Maternal PTSD associates with greater glucocorticoid sensitivity in offspring of Holocaust survivors. Psychoneuroendocrinology. 2014 Feb;40:213-20. (바로가기)
*더 읽어 보면 좋은 자료
Leen-Feldner EW, Feldner MT, Knapp A, Bunaciu L, Blumenthal H, Amstadter AB. Offspring psychological and biological correlates of parental posttraumatic stress: review of the literature and research agenda. Clin Psychol Rev. 2013 Dec;33(8):1106-33.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