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따라 돌아오는 때니 올해도 어김없다. 다른 해보다 빨리 온 것이라 해도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다. 추석이 오히려 더 아픈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더 많으리라 믿고 싶다.
다른 것보다, 가족의 사랑을 다시 확인할 기회가 되기를 빈다. 전과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가정은 여전히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서로 기쁨을 나누고 또한 보듬고 위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역 공동체의 유대는 어떨까. 아직 그럴 만한 곳도 제법 있겠으나, 많은 이들에게 지역은 차마 ‘공동체’라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겪은 빠르고 험한 변화 덕분이다. 그래도 기쁨과 아픔의 기억을 공유하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정이든 지역 공동체든 명절이 삶과 관계를 ‘공동체’답게 하는 중요한 의식이자 경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같은 시기를 사는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 또한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명절만 되면 다시 공동체가 강조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올해 추석은 착잡하다. 우리가 과연 어떤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또 만들어가고 있는가. 이 도전적인 질문 앞에 개인과 가정, 지역 공동체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영 불편하다. 아무리 잘나도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아마도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진 일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차적으로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이 그랬다. 위험을 예방하고 피하는 일은 일단 제쳐 놓자.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과연 위험에 빠진 이웃을 보호할 능력을 가졌는가?
스스로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자구(自求)’라는 말이 많은 이의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차마 공동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능력. 우리 스스로 우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 계속될 것 같다. 더 한심한 것은 공동체의 책임을 맡은 이들에게서 본 무책임과 부도덕이었다.
이후 사고를 수습하고 원인을 밝히는 일에서는 더 심했다. 우리가 본 것은 동료와 이웃의 고통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공동체의 반응이 아니었다. 점점 더 심해지는, ‘문제 유발자’로 만들고 그들을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는 노골적인 태도와 시도들.
가장 피상적이지만 또한 가장 노골적인 배제의 시도는 피해자 가족(사실 피해자 가족이 아니라 직접 피해자다)을 대놓고 조롱하는 것이다. 유력한 여당 정치인부터 이상한 이름의 ‘폭식 투쟁’에 이르기까지. 잔혹하고 야만적이다.
형편이 이런데도 과연 우리는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족과 지역 공동체만 따로 공동체다워 질 수 없다. 제대로 된 정치 공동체 없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나라 또는 국가라고 통칭되는 우리의 정치 공동체는 과연 건강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공동체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철학이자 이념은 공동체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가장 앞세우는 것과는 달리, 공동체주의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라 본다.
다른 복잡한 이야기는 빼자. 캐나다 출신의 철학자 다니엘 벨(<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쓴 다니엘 벨과는 다른 사람이다)은 공동체주의가 말하는 ‘공동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우선 장소나 지리를 공유하는 공동체. 가장 익숙하고 보통 지역사회라고 하는 바로 그 공동체다.
그 다음에는 기억과 역사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있다.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면, 상당 부분은 기억과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에 의존한다.
마지막이 심리적 공동체라 말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서로 믿음, 협력, 애타심의 정서를 나누는, 그리고 대부분 얼굴을 맞대는 개인들이 만드는 공동체다. 지리나 기억을 공유하는 것에 비해 추상적이고 불안정하다. 그러나 이것 없이 근대적 의미의 정치 공동체는 형성될 수 없다.
공동체의 여러 측면은 한 가지 기준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정치 공동체는 모든 종류의 공동체가 한꺼번에 실현된 결과다. 지리와 기억과 정서를 모두 공유한다는 뜻이다.
한국이라는 정치 공동체는 어떨까. 지역과 기억(역사)을 공유하는 것은 분명하다. 지리야 말할 것도 없다. 기억과 역사를 둘러싼 투쟁이 격렬해지고 있지만 아직은 괜찮다. 그러나 심리와 정서를 공유하는 공동체는 점점 더 의심스럽다.
추상적이고 불안정하다고 했지만,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지리와 역사를 공유하는 것에 비해서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 공동체는 만들고 경험하며 또 구성해 나가는 특성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지리와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그답게 만드는 것이 또한 이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일은 상징적(그러나 결정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심리와 정서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뿌리부터 흔들린다. 믿음과 협력, 이타심이 아니라 배제와 축출이 난무하는 것이 근거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느끼는 연대와 협력은 겨우 희미한 끈만 보고 느낄 수 있을까.
정서의 유대와 협력이 약화되면 공동체로서의 다른 조건들은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같은 곳에 살고 기억과 역사를 공유하면 무엇 하겠는가. 공동체는 쪼개지고 ‘우리’와 ‘그들’은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쪼개지는 공동체의 조짐은 자못 심각한 참이다. 최근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자살률의 국제 비교를 보면 남한이 3위다(북한 또한 2위라니 심사가 복잡해진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애를 낳지 않는 것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다. 지난 13년 동안 합계출산율이 1.3명 이상으로 높아진 적이 없을 정도다. 결국 삶과 죽음으로 나타나는 공동체의 붕괴가 아닐까.
공동체에 이 모든 책임을 돌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회복’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건 명백한 경고다. 살아가는 동기와 매력을 주지 못하는 공동체,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공통체주의가 가진 위험(전통과 복고, 권위적 민족주의, 심하면 전체주의나 인종주의)은 우리가 원하는 길과 멀다.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이다. 좀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공유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정치다(물론 넓은 의미에서). 새로움의 기반은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 형평과 같은 가치라는 것을 모두 짐작하리라.
구체적으로는 극심한 양극화와 심화되는 불평등과 대결해야 하는 정치의 책임이 무겁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야말로 정서와 심리의 공동체를 해체하는 핵심 원인이다. 더 늦기 전에 방향을 되돌려야 한다.
내친 김에 정책 차원까지 말하자. 보편적 국민을 앞세운 ‘국익’에서 벗어나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 명확하게 나누어야 한다. 뭉뚱그려 국익을 말하면 이미 있는 이익과 손해의 구조만 더욱 나쁘게 만든다. ‘국가’ 경제 활성화를 앞세운 부동산 경기 띄우기와 영리 병원 정책을 생각해 보라. 배제가 아니라 사회 통합의 정책이 절실하다.
결국 정치로 돌아간 이유는 명확하다. 개인과 지역에 한정해도 마찬가지다. 회복해야 하는 공동체가 정치 공동체의 건실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일방통행이 아니다. 앞에서 굳이 나누었지만,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의 통일성이자 상호의존성이다.
내년, 또 그 다음 추석 명절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욱 즐거운 공동의 기억이 되어야 할 터이다. 건강하고 인간다운 정치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아울러 이 시기의 시민 된 의무임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