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역사로 치면 영국은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온 것이 1942년이니 2차 세계대전 이후만 쳐도 70년에 가깝다. 그 유명한 국가공영의료체계(NHS)도 이미 65년이 더 지났다.
역사가 오랠수록 제도는 안정된다. 복지국가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보수화’라 할 수도 있으니, 한번 확립되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뜻이리라. 1970년대 후반 이후에도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가 후퇴하기보다는 확대된 것도 이러한 특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운명은 단정할 수 없다. 긴축의 시기에도 전진하며 예상과 달리 후퇴하기도 한다. 각기 사정이 있지만, 복지와 복지국가가 정치사회적 경쟁과 갈등의 장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한다. 늘 ‘복지 정치’가 문제다.
영국(잉글랜드)의 국가공영의료체계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라.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제도가 아닌가. 그러나 카메룬 총리의 보수당-자유당 연립 정부가 등장한 이후 근본부터 동요하고 있다.
겉으로는 ‘개혁’을 내세우지만, 공공과 복지의 상징이 민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 배경에는 보건의료와 복지국가의 방향성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이 있고, 지금은 굳이 말하면 친시장-반복지 진영이 권력을 쥔 상태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영국의 정치체제가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이 있다. 정권 교체에 따라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는 일이 잦으니, 좋게 보자면 책임 정치의 구현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에서는 복지국가의 정치적 토대가 여전히(!) 허약하다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후퇴를 허용하거나 요구하는 시민의 ‘복지 의식’이 그 가운데 하나다.
복지 의식이 허약하다니? 2012년 영국의 사회정책학자인 피터 테일러 구비가 발표한 논문에는 영국민의 복지 의식 또는 복지에 대한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바로 가기).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인용한다(실제 조사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 복지를 필요로 하는 (현재) 상황에 책임이 없는 집단(어린이, 장애인), 또는 가족 윤리와 노동 윤리를 준수하는 집단에 대한 복지에 더 우호적이다.
- 기여를 하고 급여를 받는 사람들을 좋게 생각한다.
- 부자 증세에 찬성하지만, 증세 대상이 되는 기준이 낮아질수록 찬성률이 떨어진다.
- 정부 재정과 세금의 관련성에 대한 인식은 약하다. 효율성을 올리면 증세 없이도 복지가 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 빈곤은 상대 빈곤보다는 절대 빈곤으로 받아들인다.
우선 놀랍다. 영국 복지국가의 역사, 그리고 국가공영의료체계와 같은 보편적 복지의 경험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영미형 복지국가가 북유럽과 비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예상을 크게 벗어난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랜 복지국가 경험을 가진 사회, 바로 영국 사람들의 복지 의식이 이런 정도다.
이 결과로 보면 영국 복지국가의 동요는 이상할 것이 없다. 겉으로 보이는 복지체제의 변화는 사회적 요구를 충실하게 반영한 결과일 뿐이다. 사정이 그토록 간단할 리 없지만, 복지국가의 토대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기에는 충분하다.
또 다른 교훈은 동요 그 자체다. 복지국가는 한쪽 방향으로 가는, 역진하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니다. 사회와 경제의 변동에 따라, 그리고 정치와 운동에 따라 얼마든지 전진하거나 후퇴할 수 있다. 복지 정치는 작은 성취에 안심할 수 없으며 ‘끝까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이제 한국의 현실을 볼 차례다. 예산 심의와 더불어 무상급식과 보육(누리과정)을 둘러싼 논란이 시끄럽다. 여기에는 예산도 예산이지만 일반 행정과 교육 행정, 대통령 공약, 정당 간의 경쟁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논점은 예산 실무나 정책의 범위를 넘는다. 대통령 공약인 보육예산을 이유로 무상급식을 공격하는 모양새다. 전혀 다른 환경인데도 복지가 후퇴할 조짐조차 나타난다. 힘과 기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전형적인 복지 정치라 할 만하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복지 정치는 다른 나라(이른바 선진국)보다 더 중요하다. 발전과 확대 과정에 있고, 그만큼 틀을 만들어가는 시기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정책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보다 정치가 정책을 결정하는 방향성이 훨씬 강하다.
같은 복지 정치지만 선진국과는 또 다른 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하향식’ 복지 정치가 두드러진다. 복지국가의 경험이 빈약하고 민주주의의 토대가 약한 가운데에 복지 정치는 주로 위로부터 시작된 것일 수밖에 없다. 후퇴와 역진도 그러하다.
이미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현재 한국의 복지 정치는 크게 두 가지에 의존한다. 하나는 복지국가 망국론이고, 다른 하나는 선별적 복지이다. 둘 다 부정의 정치다. 내용과 철학이야 이미 제법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되풀이 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번의 복지 정치는 선별 복지의 변종이라 불릴 만하다. 구체적으로는 무상급식과 보육을 대비하고 경쟁시키는데, 이는 이중의 ‘선별’(선택)을 토대로 한 것이다. 급식인가 보육인가를 선별하게 함으로써(서비스 사이의 선별), 무상급식의 보편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점이 그렇다(서비스 내의 선별).
서로 다른 복지 서비스를 두고 고르게(또는 골라야) 하는 것은 전형적인 선별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 급식과 보육을 두고 우선순위를 다투어야 하는 것을 선별 말고 달리 표현할 말이 있을까. 지금과 같은 사정이면, 다음에는 다른 그 무엇과 다시 선별하고 경쟁하지 말란 법이 없다. 아니, 늘 같은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더 크다.
서로 다른 복지 서비스를 두고 골라야 하는 복지 정치의 핵심은 새로운 차원의 선별을 강요한다. 모두에게 무상급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사회 윤리와 연대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비해 이번 선별의 핵심은 예산과 재정이라는 ‘하드웨어’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배분과 우선순위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근거가 ‘하드’한 것일수록 보편 복지를 주장하기 어렵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을 다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예산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막무가내 주장으로 비치기 쉽다. (잘못된 근거로) 그리스를 탓하듯 복지가 망국의 주범으로 몰릴 처지다.
선별과 우선순위가 해당 집단을 나누고 따라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부른다는 것이 더 심각하다. 급식과 보육을 두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묻는 것부터 분할을 통한 통치의 바닥을 다지는 것이다. 주어진 재정 범위 안에서 배분해야(그리고 경쟁해야) 하는 한, 복지 수혜 집단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피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분할의 정치이자 통치다.
다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항’ 복지 정치다. 그에 앞서, 복지 축소의 부도덕성을 묻는다. 그렇지 않아도 저출산이 ‘재앙’이라고 하는 마당이다. 급식과 보육을 두고 선택하는 것이 도대체 정책이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유체 이탈이나 된 것처럼 따로 따로 말하는 사람들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항하는 복지 정치의 첫 걸음은 국가 재정의 맥락 안에서 복지 재원을 정치화하는 것이다. 복지를 위한 증세가 중요하지만 일단 제쳐 놓자. 재원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도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
분할의 복지 정치가 만드는 신화 한 가지는 복지 재원의 총량이 일정하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을 감수하는 순간, 뺏고 뺏기는 싸움을 피하기 어렵다. 복지 재원은 기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만큼 재정 배분의 기존 체계에 길들여진 사회도 드물다. 분단과 경제성장의 절대적 권위 때문이지만, 토건과 지역 개발, 그리고 산업 발전의 명분이 갖는 힘도 만만치 않다.
증거는 차고 넘친다. 4대강 사업에 쓴 돈, 엉터리 사회간접자본(도로, 공항 등), 자원외교의 낭비, 줄줄 새는 방위사업비… 분노로 끝날 것이 아니라 재원 배분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복지 재원을 늘리는 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대항 정치는 밑(뿌리)으로부터 복지의 연대를 만들고 강화하는 것이다. 나에게 해당하는 보육이 너에게 필요한 급식보다(또는 그 반대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 한 분할의 통치에 맞설 수 없다. 약간이라도 재정이 부담이 될 때마다 갈등은 되풀이되고 선별의 이분법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해관계의 각축과 갈등을 넘어 복지의 연대를 만들고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요에 기초한 구체적인 복지 요구를 촘촘하게 조직하되,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것. 전체 복지 수준을 같이 높여가는 것. 이것이 기초가 되어야 작고 허약한 복지국가라도 역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