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기사 바로가기)
담배 기업과 손잡은 티파티
마블 유니버스에는 외모도 성격도 집안 배경도 전혀 다른 슈퍼 히어로들이 모여 산다. 시내 핫 플레이스에서 스파이더 맨, 아이언 맨, 울버린이 우연히 마주칠 법도 하지만, 현재 소속사가 다르다보니 이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블 유니버스에서도 보기 힘든 의외의 연합전선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 보수주의 ‘티파티(Tea Party)’ 운동과 초국적 담배 기업들의 동맹이 그것이다. 미국 주 정부들의 담뱃세 인상과 금연 구역 확대 정책에 보수주의 풀뿌리 운동을 표방한 티파티 조직들이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글란츠 교수 팀은 저명 학술지 <담배 규제>에 발표한 최근 논문에서 이 기묘한 동맹의 수수께끼를 파헤쳤다.
연구진은 레거시 담배 문서 도서관, 인터넷 아카이브 웨이백 머신(Wayback Machine), 구글, 경영과 법률 정보 아카이브인 LexisNexis, ‘미디어와 민주주의 센터’, ‘책임성 정치 센터’ 등의 자료들을 분석하여 그 관계를 추적했다. 이들이 발견한 것은, 티파티 핵심 조직과 담배 기업들이 오래 전부터 인적, 금전적으로 상당한 연계를 갖고 일관된 전략을 구사해왔다는 것이다.
2009년, 티파티 운동이 혜성처럼 나타나 선거에서 파란을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이를 새로운 유형의 성공적인 풀뿌리 운동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정치적 이해 집단과 기업, 홍보 업체들의 연합체가 만들어낸, ‘풀뿌리’를 가장한 일종의 ‘인조 잔디’ 운동이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다.
특히 ‘번영을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Prosperity, AFP)’과 ‘프리덤워크스(FreedomWorks)’ 같은 조직은 티파티 운동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2009년 4월 전국적 규모의 조세 저항 시위, 8월의 건강 보험 개혁안 반대 타운홀 시위, 9월의 워싱턴 납세자 행진 조직 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바로 이 두 조직이 주 정부의 담뱃세 인상과 금연 구역 제정에 반대하는 지역 티파티 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글란츠 교수 팀의 분석에 의하면 이러한 관계의 시작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담배 기업들은 1980년대부터 담배 규제에 반대하기 위해 풀뿌리 흡연자 권리 운동을 조직해왔다. 대중이 담배 기업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 뒤에 숨어서 활동한 것이다. 또한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들(Citizens for a Sound Economy, CSE)’ 같은 무늬만 시민단체에 자금을 지원하여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의제를 다루도록 했다.
1991년과 2002년 사이 담배 기업들은 CSE에 최소 530만 달러를 기부했는데, 필립모리스는 이를 A급 관리 조직으로 지정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0년대에 CSE는 적극적으로 담배 규제 반대 활동을 벌였다. 우선 1992년 미국 환경보호청이 간접흡연을 1급 발암 물질로 지정하려고 하자 과학적 엄밀성을 문제 삼으며 새로운 위험 평가 표준을 제시했다.
1993-94년에는 담뱃세 인상이 포함된 클린턴 정부의 의료 보험 개혁안 반대 캠페인을 전개했다. 당시 담뱃세 인상 반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의료 보험 개혁안을 통째로 반대하는 전략을 취했다. 필립모리스는 하원 에너지 통상위원회 로비 자금으로 CSE에 4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1994~2001년에 걸쳐서는 작업장의 간접흡연을 감소시키려는 직업안전보건청 규제안에 반대하는 캠페인과 로비를 벌였다.
1994년에는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이 담배에 포함된 니코틴 등의 성분을 문제 삼아 관리 대상 품목으로 지정하려 하자 결사적인 반대 캠페인을 조직했다. 이들은 관리 대상 품목 지정의 부당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비효율과 관료주의라는 명목 하에 FDA 자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예컨대 FDA가 쓸데없는 일들을 벌이느라 신약 승인이 늦어져서 불필요한 죽음이 유발되고 있다며 ‘규제에 의한 사망’이라는 무시무시한 라디오 광고를 방송하고, 이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FDA 청사 신축을 예산 낭비라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또 담배 때문에 지출된 메디케어 재정을 담배 기업이 보상해야 한다는 법무부 소송에 반대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담배 기업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대변했던 CSE는 2004년에 AFP와 프리덤워크스로 분화했다. 하지만 아래 그림에서 드러나듯 그들의 인맥과 전략은 이후 티파티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림의 왼쪽 아래에 위치한 ‘소비자 자유 센터(Center for Consumer Freedom, CCF)’는 담배 기업과 관련된 또 다른 티파티 조직이다. 여기에는 코카콜라, 몬샌토, 웬디스 같은 식품, 농산물 기업들도 관여하고 있다. 이들은 담배 뿐 아니라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소비 상품에 대한 규제 반대에 적극적이다. 2012년 블룸버그 뉴욕 시장이 어린이 비만을 줄이기 위해 슈퍼사이즈 탄산음료 판매를 규제하려고 했을 때, CCF는 블룸버그 시장을 비난하는 전면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게재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뉴욕 시민들은 시장을 원하지, 유모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AFP, 프리덤워크스, CCF를 포함한 티파티 운동은 공통적으로 사유 재산의 권리, 소비자 선택, 작은 정부를 강조한다. 담배 규제 자체를 무용하다고 말하거나 담배가 건강에 해롭지 않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규제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보다 중요한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 보험 개혁안을 반대하는 논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모든 캠페인에서 담배 기업의 이름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외양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풀뿌리’ 시민운동이다.
현재 티파티는 미국을 넘어서 해외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예컨대 2012년 프리덤워크스는 이스라엘, 일본, 나이지리아 등 30개국의 활동가를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글란츠 교수 팀은 논문의 말미에서, 담배 기업과 티파티, 관련 조직들의 오래된 커넥션을 정치인, 미디어, 대중들이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칫 시민들의 자유를 촉구하는 풀뿌리 운동으로 오해하여 호도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상황은 어떨까? 일단 글란츠 교수 팀의 연구 같은 실증 자료 분석은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 사실 이런 연구가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별로 필요해보이지도 않는다. 한국 기업들이 규제 반대 여론을 만들기 위해 굳이 가짜 풀뿌리 운동까지 조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어떤 곳인가? 국세청 관료들이 퇴임 후 주류산업협회의 임원으로 직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나라다. (조정식 의원의 2012년 국정 감사 자료를 보면, 한국주류산업협회 역대 11명의 회장 중 7명(5대 이후 현재까지)이 국세청 출신이며, 전무이사의 경우에는 역대 11명 중 8명(4대 이후 현재까지)이 국세청 출신이다. (☞관련 자료 :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4 연구 보고서 : 알코올 규제 정책, 패러다임을 바꾸자>)
또 국제 담배 규제 기본 협약에서 금지를 촉구하는 담배 기업의 스폰서 정도가 아니라 KT&G가 아예 스포츠 팀을 직접 운영하는 곳 아닌가? (☞관련 자료 :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0 연구 보고서 : 담배규제와 건강 불평등>) 심지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규제 단두대를 만들겠다는 발언을 하는 마당이니, 티파티 활동가들도 가히 부러워할 만한 곳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역시 예상 밖의 연대와 기묘한 조합은 어디서나 펼쳐질 수 있는 법.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
참고 자료
- Fallin A, Grana R. Glantz SA. ‘To quarterback behind the scenes, third-party efforts’: the tobacco industry and the Tea Party. Tob Control 2014;23:322-331.
- 이번 연구에 큰 도움이 된 레거시 담배 문서 도서관(Legacy Tobacco Documents Library)은 미국 46개 주 정부와 주요 담배 기업의 소송 중 공개된 담배 기업의 내부 자료들을 모아 놓은 디지털 도서관이다. 1950~2009년에 미국 담배기업들이 작성한 약 1400만 건의 문서들이 축적되어 있으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바로 가기 : Legacy Tobacco Documents Lib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