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란’이란 소리를 듣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왜 좋아지는 것이 드물까. 심지어는 수습도 잘 되지 않을까. 이것이 오늘 논평의 문제의식이다.
본래 대란(大亂)은 큰 난리니 전쟁을 뜻한다. 국가나 그 구성원으로서는 엄청난 영향을 받는 일이다. 그 뒤로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2015년 한국 사회는 그 많은 대란을 겪고 있으니 전쟁터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어린이집 폭력 사건, 연말정산 논란, 그리고 전쟁하듯 치르는 정부 고위직 인사하며, 건강보험료 개선안 포기에 전임 대통령의 회고록까지. 정치, 사회, 경제, 무엇보다 정책이 그렇다.
작은 일까지 치면 평범한 사람들의 불만과 요구가 빗발친다. 말이 지나치다 싶으면 바꾸어 파문이라고 해도 좋다. 파문(波紋)은 물의 표면에 이는 물결이란 뜻이니 대란과 비길 바는 아니다. 그래도 현상을 흔들고 파장을 미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2015년이 겨우 한 달 지났을 뿐인데, 지난해가 까마득하다. 벌써부터 대란과 파문을 너무 많이 경험해서다. 그냥 “한국은 역동적 사회”라는 익숙한 표현으로는 모자란다. 아무리 빨리 바뀌는 사회라 치더라도 무심하게 지나가기에는 숨 가쁠 정도가 아닌가.
요즘의 대란과 파문은 확실히 말의 인플레인 점이 있다. 인터넷 기사의 ‘낚시용’ 제목으로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새로운 도전을 맞아 요동치는 때에 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럴 소지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부분 대란과 파문은, 말에 어울리지 않게 오래 가지 않는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일도 어지간해서는 그저 며칠로 끝난다. 겉만 건드리고 심층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말은 무엇이든 그 속에 사람들의 좌절과 희망이 같이 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사건은 당연히 변화를 촉발하는 원동력이어야 한다. 그만한 힘을 가질 법한데, 그게 그렇지를 않다.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만 꼽아보자. 하나는, ‘뜬’ 관심의 특징대로 ‘큰’ 난리조차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일이 터지니 어떤 논란도 수명이 길지 못하다. 시간으로도 그렇지만 생각과 논의는 더욱 휘발성이 강하다.
한 가지 한 가지가 모두 중요한 것, 나와 너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도 그렇다. 일이 있을 때 잠시뿐, 좀처럼 변화와 개선을 압박하는 지긋한 힘으로 바뀌지 못한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 변화 정도다.
최근 몇 주간 등장했던 복지 증세는 어떨까? 그리고 지난 주말 돌출했던 건강보험료 개편을 둘러싼 논의는? 역시 점차 비슷한 길을 가지 않을까 싶다. 잠깐 주의를 끌었지만 벌써부터 여러 가지 일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할 모양새다.
당장 이번 주는 또 다른 ‘핫’ 뉴스들이 기다린다. 여당은 원내대표를 새로 뽑고, 야당도 전당대회를 할 예정이니, 뻔하다. 누가 이겼느니 배경은 무엇인지, 다음 대선은 어떤지에 신경 쓰느라 바쁠 것이다. 대통령 지지율에는 왜 또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이런 빠른 속도와 의제의 손바뀜이 어찌 ‘우매한’ 대중의 탓이겠는가. 당장 일이 아닌 한, 누구라도 계속 주의를 기울이긴 어렵다. 다른 일이 또 생기는 것도 그렇지만, 주의와 관심에 그만한 보람과 보답이 없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 나 혼자 집요하게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모두가 구경꾼이 되어간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녹음된 웃음소리를 트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그리고 그것에 따라 웃는) 느낌이랄까. 지지나 반대, 또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와 반대와 분노를 구경하는 것. 그 흔한 여론조사를 구경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자처럼 여론의 추이를 ‘관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찬성과 반대, 논란조차도 소비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때문에 마치 참여가 늘어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수가 가짜다. 조롱과 냉소가 더 많다면, 그리고 그것이 더 흥미를 끈다면, 마치 녹음된 웃음소리와 같이 ‘유사 참여’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구경꾼이 되면(구경을 구경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관심사는 더 빨리 움직이고 더 쉽게 증발한다. 그러니 악순환이다. 눈을 끌만한 자극이 없으면 쉽게 사라지고, 그 때문에 더 큰 자극을 좇아 움직이다. 그리고 그 자극은 흔히 의도적으로 배치된다. 실시간 검색어를 위한 포탈의 기사 어뷰징과 다를 바 없다.
짧은 지속 시간과 유사 참여. 관심사와 의제가 이런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쪽(어떤 종류의 권력일 수도 있다)에 당연히 유리하다. 게다가 정부와 권력이 가진 가장 중요한 능력은 의제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조건에서는 그런 능력이 의도적으로라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의제를 관리함으로써 통제하는 것.
연말정산이든 복지재정이든 또는 건강보험료 개편이든, 정부와 기득권층은 관심과 주의를 끌 또 다른 이슈를 내놓을 참이다.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증세와 선별 복지를 놓고 양자 택일”을 하자는 여당의 주장이 그렇다.
본격적인 논의를 하자는 것처럼 들리지만, 복지 재정을 둘러싼 편 가르기가 숨은 의도가 아닌가 싶다. 선별이라는 말이 벌써 그렇지 않은가. 누가 (더) 내고 누가 (더) 받는 것을 두고 또 다른 대란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재원 뿐 아니라 지출에 대한 공격도 폭발력이 크다. 국가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재원의 대란을 관리하기가 훨씬 어렵다. 그 대신 ‘도덕적’ 해이와 비효율성, 낭비 등이 새로운 관리 수단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이 또한 익숙한 편 가르기 방식이다.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의제들을 이리 저리 뒤쫓다가 주어진 범위와 선택지에 붙들릴까 더 걱정스럽다. 보육 예산을 줄일지 말지, 공제액이 150만원이 맞는지 200만원이 맞는지, 건강보험료 감면 기준을 어느 선으로 할지. 그것들이 유일한 ‘전선’이 되는 순간 대란과 파문은 어떤 선을 넘기 어렵다. 관심 이슈는 의도적으로 관리될 것이 뻔하다.
결국 문제는 ‘의제의 주권’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 답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 시기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 ‘조직화’를 제안한다.
모든 것이 개별화, 개인화되는 시대에 조직화와 연대는 점점 더 낯설다.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임시와 일시를 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광우병의 촛불 같은 것. 앞에서 가능성이라 했지만 작은 것도 결코 낙관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통하지 않고 공고한 권력이 의제를 독점하고 통제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을까. 수동적 소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를 강요하는 인터넷과 미디어, 그리고 그에 맞춘 우리의 새로운 생활양식 탓이 아니다. 어떤 철학자의 말마따나 프로파간다는 차라리 중세(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훨씬 더 강했다.
그는 프로파간다는 심지어 축소되었다고 주장한다(그는 알랭 바디우다). 인터넷과 미디어는 서로 더 많이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 때문이 아니다. 저항의 통로와 실천의 결속이 없기 때문이다. 직접 말하고 같이 행동할 공간 없이, 우리는 완전히 흩어져 있다!
흩어짐을 극복할 말과 행동의 새로운 거점이 필요하다. 그것이 직장, 동네, 학교, 또는 사이버 공간, 어느 곳인지는 불확실하다. 그 모두일 수도 있지만, 더 유력한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 된 방식을 되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공유와 네트워킹이 가능한 곳에서, 무엇보다 힘을 모으는 과정으로서 조직화가 필요한 것은 틀림없다.
연말정산과 건강보험료, 복지 재정, 보육, 그 무엇이든 좋다. 조직화를 거쳐야 개별적인 날 것이 모여 모양이 만들어진다. 비로소 오래 지속되어 발효되고 힘도 가지게 된다. 수동적 참여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가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란과 파문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좋은 변화의 힘이 조직되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