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정신건강도 건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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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평은 보통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에 처음 실린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에도 우울한 주제는 피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일이 많은 시절, 평온하거나 의욕에 넘쳐야 할 시간이 아닌가.

논평을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 다루는 주제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건강과 정신보건 문제다. 혹시 좀 힘들더라도 주말인 4월 4일이 ‘정신건강의 날’이었으니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마침 독일 저먼윙스 여객기의 사고 때문에 정신건강 문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기를 추락시킨 쪽으로 굳어지면서 그의 정신 병력이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과거에 치료 받았다는 우울증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혹시 비슷한 일이 있다면 어떤 경과를 밟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전수 조사야 당연하겠고, 현직에 있는 모든 사람의 정신 ‘감정’을 하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과거에 지나갔던 짧고 작은 병력도 제한 사항이 될 것이 뻔하다.

외국이라고 왜 그런 반응이 없겠는가, 정신질환의 병력을 가진 사람은 조종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진 것은 당연지사. 영국정신의학회의 회장이 바로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뉴스가 오히려 놀랍다. 그는 우울증 병력이 있다고 바로 조종사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을 ‘조건반사적’ 반응이라고 지적했다 (가디안 기사 바로가기).

사고가 조종사의 병력(현재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생긴 것인지는 차분하게 따질 일이다. 오랜 습관, 짐작과 직관, 의심스러운 상식에 의존하면 인권 침해는 물론이고 다음 사고도 예방할 수 없다. 정신질환의 경우에는 완고한 편견과 차별이 가장 심각한 장애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어딘가. 물론, 이번 일은 정신건강과 정신질환의 것으로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징적 사건으로도 전체를 짐작할 수 있고 정신보건의 사회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비교하면 더욱 답답한 것이 우리 안의 사정이다. 20년 전인 1995년 <정신보건법>이 제정되었지만(실제 시행은 1997년 초부터), 법의 정신인 인권과 건강권, 복지 실현은 아직 아득하게 멀다.

정신보건법이 있다는 것조차 처음 듣는 이가 많을 테니 현재의 법 제1조와 제2조를 옮긴다. 제정 당시와 거의 차이가 없고, 제2조 2항에 ‘보호’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제1조 (목적) 이 법은 정신질환의 예방과 정신질환자의 의료 및 사회복귀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정신건강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기본이념) ① 모든 정신질환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받는다.

② 모든 정신질환자는 최적의 치료와 보호를 받을 권리를 보장받는다.

③ 모든 정신질환자는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지 아니한다.

④ 미성년자인 정신질환자에 대하여는 특별히 치료, 보호 및 필요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⑤ 입원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자에 대하여는 항상 자발적 입원이 권장되어야 한다.

⑥ 입원중인 정신질환자는 가능한 한 자유로운 환경이 보장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자유로이 의견교환을 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이 조문을 읽고 인권과 건강권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뉴스에 흔히 나로는 강제입원 등의 인권 문제는 오히려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의 건강권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적용되는 것이다.

건강권(권리) 부분을 주목하면서, 특히 누가 권리 보장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 묻고자 한다. 한국에서 권리 보장에는 유난히 주어가 없는 표현이 많다. 앞의 법률 조항에서도 마찬가지다. ‘보장받는다’ ‘보장되어야 한다’로 쓰여 있고, ‘누가’ 할 것인지는 모호하게 숨어 있다.

인권으로서의 건강권을 말할 때, 권리를 충족해야 할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국가에 있다. 이 법에 규정된 정신의 건강권도 다를 바 없다. 정신보건에서는 더더구나 숨어 있는 책임 주체, 국가를 불러내야 한다.

지난 20년간 건강권 충족을 위해 국가가 해온 일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정신건강법이 제정될 당시 많은 이들이 품었던 희망은 어디 가고 여전히 비슷한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중이다. 처음 우리 사회가 함께 가졌던 열정은 오히려 식었다.

 

오늘은 관심을 갖자는 것이 핵심이니, 몇 가지 급하고 중한 현실만 짚는다.

우선, 병을 가진 사람들이 ‘최적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만성 정신질환에서 특히 심하고, 지나치게 긴 장기 입원과 치료의 낮은 질이 여전히 큰 숙제다.

만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많은 환자가 입원 치료를 받고 있고, 이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렵다. 유난히 의료급여 대상자가 많은 것이 이 때문이다. 결국 만성 정신질환과 빈곤, 의료급여, 장기 입원은 따로 나누어 생각하기 어렵다.

의료급여 환자의 치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불평등과 차별이 심한 것은 오래 된 문제다. 제도의 미비와 재정의 한계, 공공의료의 취약성이 함께 묶여 있다 (다음 기사가 이 문제를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다. 기사 바로가기). 인도주의로 보더라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자 우리 사회의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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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의 치료’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법 제1조에 명시된 ‘사회복귀’라는 정신이자 목표다.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가능하면 빨리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사회복귀는 무슨 정책이나 사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전라북도의 현황을 소개한 최근의 신문기사 하나를 인용한다 (전민일보 2015년 2월 13일자 바로가기). 아마도 이곳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정신질환자의 사회 적응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은 정신질환자 사회복귀시설 등 민간기관에 맡겨진 가운데 병력자의 시설 이용률은 매우 낮다.

2014년 한해 도비의 지원을 받는 도내 21곳 복귀시설을 통해 입소인원 229명과 방문인원 392명 등 총 621명이 적응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정신질환 병력자중 0.5%만이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활용한 셈이다.”

 

치료와 재활이 이런데, 더 넓은 범위에서 (이 역시 법 제1조에 명시된!) 정신건강의 증진과 정신질환 예방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계획마다 청소년, 노인, 취약계층, 우울증, 알코올 문제를 말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그리 미덥지 않다.

 

법 제정만 따져도 20년이 지났는데, 경과와 결과를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정신건강과 질환이 여전히 ‘사회문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신보건법이 선언한 것과 달리) 정신건강이 아직 건강권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건강권의 토대가 부실하면 국가가 이를 충족할 책임을 소홀하게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사정은 이렇다. 다른 건강과 질병에 비해 정신 건강은 상대적으로 당사자의 목소리가 약하다. 게다가 편견과 오명, 낙인도 여전하니, 가족과 ‘보호자’도 적극적이기 어렵다. 스스로 차별을 받아들이고 내재화하면 당사자의 침묵은 당연하다. 무슨 수로 건강권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까.

건강권을 기초로 정신건강과 정신질환의 협력 틀을 다시 구성해야 한다. 역할을 나누더라도, 국가, 환자(가족), 그리고 의료인이 중요한 주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은 새롭게 시민(사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침묵이 길어지는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대신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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