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사회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사행 산업
최근 한국마사회 용산 장외 발매소(화상 경마장) 이전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의 반발이 크다. 화상 경마장이 성심여고 주변 학교 정화 구역으로부터 15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이전 추진 단계부터 주민들의 반대 의견이 컸다. 그러나 마사회와 경마장 인·허가권을 가진 농림축산식품부는 주민들의 반대에도 결국 이전을 강행했다.
전국의 마사회 사업장, 즉 경마장과 화상 경마장은 33개소에 이른다. 2015년 마권 판매 수입 예상 규모는 7조7000억 원이라고 한다.
경마 이외에도 경륜, 경정, 복권, 강원랜드 카지노 등 합법적 사행 산업 규모는 2014년 기준 약 19조9000억 원에 달한다. 아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인오락실, 온라인 도박 등 불법적 사행 산업까지 포함할 경우 한국의 사행 산업 규모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합법적 사행 산업의 성장에는 세수 확대라는 중앙, 지방 정부의 의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합법적인 사행 산업 매출 중 약 2조3000억 원(총 매출액의 약 12%)가 중앙 또는 지방 정부의 세금으로 걷혔다. 이는 2014년 국민기초생활보장 생계 급여 예산 2조5000억 원과 맞먹는 규모다. 하지만 이러한 세수 중대에는 개인의 금전적 손실을 물론 도박 중독이라는 심각한 폐해가 수반된다. 발표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국의 도박 중독 유병률은 2014년 5.4%로, 2011년 기준 미국 3.2%, 영국 2.5%, 프랑스 1.3%, 캐나다 1.3%에 비해 크게 높은 편이다.
한 때 ‘로또만이 답이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된 적이 있다. 불평등이 심해져서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계층 사다리를 오를 수 없음을 빗댄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우연한 일확천금이고, 이는 가볍게는 호기심 어린 복권 구입부터 심각하게는 도박 중독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실상 도박은 계층 상승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불평등을 더 악화시킨다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모나시 대학의 린토울 교수 연구 팀은 인구 400만의 호주 멜버른 지역을 대상으로 전자 도박기로 인한 금전적 손실 규모와 지역의 사회 경제적 박탈 수준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했다. (☞관련 자료 :Modelling vulnerability to gambling related harm: How disadvantage predicts gambling losses)
호주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 대비 전자 도박기 수가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한다. 2010년 한 해 동안 1인당 평균 도박 손실액이 미화 1300달러에 이를 만큼 높았다. 호주 도박경험자의 80~85%가 전자 도박기를 도박 중독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을 정도이다. 호텔, 클럽 등에 설치된 전자 도박기를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호주 성인 인구의 5~10%에 달한다. 성인 인구의 약 2.4%에 해당하는 도박 중독자들이 전체 전자 도박기 수입의 42~75%를 책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주 정부 전자 도박기 관리 부서로부터 2005년 이후 5년 동안 전자 도박기가 설치된 호텔, 클럽의 고객 손실 자료를 확보하고, 지역별 18세 이상 성인 인구수와 지역의 상대적인 사회 경제적 열악함 정도(Index of Relative Socioeconomic disadvantage, IRSD)를 계산했다. 멜버른 내 총 331개 지역별로 이들 지표 값을 산출하고 사회 경제적 열악함의 수준에 따라 지역을 5개 군으로 구분하여, 그에 따라 도박 액 손실 규모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통계 모형을 개발했다.
이 모형에 따르면 사회 경제적 열악함이 가장 심한 1분위 지역의 성인 인구 1인당 연 평균 도박 손실액은 849달러(95% 신뢰구간 749~963달러), 열악함이 가장 덜한 5분위 지역의 도박 손실액은 평균 298달러(95% 신뢰구간 260~342달러)였다. 지역 내 성인 1인당 도박으로 인한 손실액은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일수록 많았으며, 가장 열악한 지역의 도박 손실액 규모는 가장 잘 사는 지역의 2.8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 도박기 밀집 정도를 고려해도 이러한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일수록 전자 도박기 이용이 더욱 쉽고 그로부터 초래된 도박 손실액은 해당 지역 주민의 가처분 소득 감소, 전자 도박기 소유주의 더 많은 매출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도박으로 인한 피해가 개인의 금전적 손실을 넘어서 전체적인 사회적 불평등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의 손실에는 전자 도박기 손실액 이외에 도박 중독과 관련된 정신 건강 문제, 이와 관련된 의료비, 노동력 손실, 가정과 지역사회의 불화 같은 중요한 간접적 손실 규모는 고려하지도 않았으니, 그 피해 규모는 사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국내 경마 총매출액과 1인당 평균 배팅 액은 각각 7.6조 원과 50만 원이었다. 이는 카지노 전용 시설인 강원랜드의 총매출액 1.4조 원과 1인당 평균 배팅액 47.3만 원보다 오히려 높은 것이다. 게다가 카지노와 달리 경마장은 전국의 33개소에 흩어져 있어 접근성도 좋다.
사행 산업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소수에게 집중되며 그 피해는 대개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이들의 몫이다. 사행 산업은 서민들의 취미 생활이거나 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기회라기보다 현재의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신기루일 뿐이다. 정부가 나서서 이를 권장하고 확대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유원섭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