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정당과 ‘혁신’의 앞날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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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선거다. 또, 선거를 통해 정치 행위자인 정당을 만나기 때문에 그 때나 되어야 비로소 정당을 경험한다. 이것이 한국 정치와 정당의 현실이라면, 정당은 아직 일상이라 할 수 없다.

선거가 한참 남았는데도 정당(또는 정당이 되려는 세력)이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제1 야당의 혼란과 난맥이 두드러진다. 국정감사의 와중에 이번 주가 정점을 찍을지도 모르겠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하는 말 한 가지. 홀로 비판받을 일은 아니니 당사자들은 억울해 하지 마시라, 무릇 정당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반면교사로 삼을 뿐이다.

또한 미리 말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한참 떨어진 자리에서 관전평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과 보건의료의 현실 역시 지극히 정치적이라고 할 때 정치의 실력은 우리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 시끄러웠던 메르스, 지리멸렬한 후속 대책을 보라. 응급실 개선은 어디로 가고 공공병원의 앞날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정당과 정치가 오늘과 같지 않았다면 후속 조치 또한 다르리라 확신한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첫 번째 현상은 계파 또는 정파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정당이 박정희 시대의 여당이나 유신정우회 같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누어 다투고 경쟁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한국의 메이저 정당들의 파당은 나누고 나누어진 기준이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친박’과 ‘비박’은 무엇이며 ‘친노’와 ‘비노’는 또 누구인가. 이름부터 그렇지만 이런 잣대가 무슨 정파라고 할 수 있는지 민망하다. 하다못해 매파와 비둘기파라는 소박한(?) 구분이 여러 모로 더 낫다.

유력한 정치인을 중심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답습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치자금이라는 현실적 이유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러는지 큰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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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혁신’의 정체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정당이든 무슨 힘든 일만 있으면 ‘환골탈태’와 개혁과 혁신을 내세운다. 지금의 제1 야당도 선거 후에 참패를 반성한다면서 ‘혁신위원회’를 만들지 않았던가. 여당이 과거에 천막 당사를 만들고 내세웠던 것도 마찬가지다.

당명, 로고, 간판, 당사를 바꾸는, 딱 거기까지. 혁신과 개혁이 요란하지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무엇을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혁신된 미래의 모습은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면 누가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을 부탁한다. 친노가 어쩌고 비노가 어떻다는 말이 언론에 보도되니 그러려니 할 뿐, 혁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혁신하려고 하는 것은 정당의 지향성인가 정당을 구성하는 방식인가, 그도 아니면 유권자를 대표하는 방식인가. 만약 내부 사람만 알면 되는 것이면, 내세우지 말고 그냥 조용하게 내부 일로 하시라.

 

셋째로, 경쟁의 방식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집권을 바라는 경우는 당연히 정당끼리 경쟁해야 하고, 정당 안에서도 유력한 정파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쟁을 피할 수 없다. 흔히 정치를 대안과 가치에 대한 경쟁이라 하지만, 지금의 정당이나 정치 지도자는 무엇을 어떻게 경쟁하고 있는가?

현실 정치의 이성은 오래되고 익숙한 정치 지형(예를 들어 연고)에 의존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여당은 그렇다 치고, 기존의 질서 안에서 늘 불리할 수밖에 없는 야당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실망스럽다. 토대가 충분치 않다는 것은 오래 된 이유였다. 터무니없는 핑계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여론조사로 정당의 의사결정을 대신하는 웃지 못 할 상황, 이 조차도 현실의 정당조직과 구성원을 떠올리면 이해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참인가.

 

세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열거했지만, 상세한 것까지 포함하면 보탤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의 핵심은 한 가지로 모인다. 한국 정당, 그 중에서도 오늘 말하는 제1 야당의 갈등과 경쟁, 투쟁, 그리고 혁신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정당은 뿌리부터 ‘제대로’ 바뀌어야 한다!

 

혁신의 방향을 주장하기 전에 냉소를 먼저 짚어야 하겠다. 우리가 정당 혁신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좋은 정치와 정당을 필요로 하는 엄혹한 현실 때문이다. 임금 피크제, 청년 실업과 일자리, 자영업의 몰락, 복지 후퇴, 건강보험료 부과,…크고 작은 사례는 열거하기에도 벅차다. 요컨대 우리의 고단한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정당을 우회할 방법이 없다. 냉소와 조롱이 아니라, 현실 정치를 압박해야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또 한 가지, 늘 그래 왔다고 무력함과 ‘소용없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일이다. 정치라면 우리보다 훨씬 더 관성과 경로가 공고할 법한 유럽 국가들을 보라.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은 이미 집권당이고,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2014년 창당 20일 만에 당원 수 3위의 거대 정당이 되었다. 영국 노동당도 이제 막 ‘극좌’ 제레미 코빈이 당 대표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적 옮음이나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맥락이 다르지만, 기반부터 요동하는 다른 공간은 기득권과 관행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는 좋은 교훈이 되고도 남는다.

지연과 학연, 그리고 수많은 연고를 넘어선, 가치와 지향을 중심으로 한 정당과 정파, 그리고 이에 기초한 혁신을 촉구한다. 현실의 어려움과 토대의 한계를 말하지 말라. 그런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현실 정치의 전문가인 그대들이 할 일이다. 다른 모든 현실 정치의 요소는 여기에 복종해야 한다.

 

가치와 지향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호하다면, 보건의료에서 몇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정치의 이념과 비전이 한 분야에만 홀로 관철되기 어렵다면, 보건의료의 지향은 또한 경제와 노동, 교육, 복지에 연결된다. 다른 분야에서 무엇을 물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바란다.

 

보건의료의 가치가 포함하는 구체적 내용은 2014년 2월의 <서리풀 논평>에서 ‘안철수 신당’에 물은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신당’은 무엇을 하려는가.).

 

첫째, 건강과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적 사회보장과 민간보험의 역할 분담, 보건의료 공급의 주체와 방식(예를 들어 공공병원), 보건소와 지방의료원, 국립 병원의 역할, 민간 병원이 기여할 바에 명확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둘째, 보건의료 영리화, 산업화, 시장화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묻는다. 이것이 정권과 정부의 정치경제적 노선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느 정당도 모호한 태도를 가져서는 자격이 없다. 보건의료는 상품과 산업, 영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기본권이자 삶의 질, 또는 복리인가.

셋째, 불평등에 대한 입장이 중요하다. 다른 배분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건강의 분포도 정의의 핵심 질문이다. 소득 불평등이 더욱 깊어질 것이 뻔한데, 혁신된 정당은 성장을 위해 불평등을 감수할 것인가, 온 힘으로 저항할 것인가.

 

정파가 나누어지고 이들 사이에 경쟁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혁신은 더욱 더 그렇다. 다만, 그 경쟁과 투쟁, 그리고 혁신은 가치와 지향을 중심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혁신도 현실 정치를 핑계로 한 정략일 뿐이다.

 

내침 김에 보태자. 이제 ‘신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길 텐데, 이들에게도 같은 것을 묻는다. 지역 연고와 개인의 친소관계, 당선의 가능성, 이런 것 말고 당신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만들든 뭉치든 헤어지든, 이것만은 명확히 밝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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