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총선 (개그) 콘서트’를 시청하는 것에 그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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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4월(!) 총선 이야기를 듣지만 오리무중이다. 선거구조차 정해지지 않았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당, 누가 나설지도 모르는 우리 지역의 후보자, 많은 정당의 종잡을 수 없는 정체성,…어느 때보다 혼란스럽다.

이런 선거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번에도 ‘정권 심판론’과 ‘지역 일꾼론’이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같아서는 무슨 차이인가 싶다. 지역 선거라서 더 그렇겠지만, 하겠다는 일도 ‘대동소이’다.

차이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내 실천(예를 들어 투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과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손톱만 한 가능성이라도 있어야 몸과 마음이 움직일 것이 아닌가.

지금 투표의 효능감, 나아가 정치의 효능감은 어느 때보다 낮다. 그 무엇도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다면, 정치학 이론이 말하는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투표와 정치 실천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효능감은 반(反)-정치의 유혹으로 이어진다. 가망 없는 현실 정치에서 눈을 돌려 나 개인의 평화와 행복에 집중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사회적이라 해도, ‘근본’에 천착하며 먼 훗날을 기약하는 편이 합리성의 원칙에 맞다.

 

합리적 무시가 반-정치의 소극적 토대라면, 정치의 상품화는 반-정치의 적극적 토대다. 지금 정치는 연예 프로그램이나 마찬가지다. 정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되었고 미디어는 24시간 ‘연기’를 중계한다. 참여하고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 구경하고 품평하며 구매해야 하는 ‘상품’으로서의 정치. 추문과 ‘잡음(노이즈)’조차 수익을 내면 환영받는 것.

어떤 철학자의 말을 활용하면, 현실 정치는 상품화를 통해 ‘상호 능동(inter-activity)’에서 ‘상호-수동(inter-passivity)’의 것으로 바뀌었다. 본래의 정치적 주체는 미디어(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중계하는 정치 ‘프로그램’을 구경하고, 그에 반응하는 댓글은 각본을 다시 쓰게 한다. 개그 콘서트가 만들어내는 웃음과 다를 것이 없다.

“고된 일에 지친 상태로 TV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어도 나는 코미디 쇼가 주는 긴장 완화를 느낀다. 마치 TV가 나를 대신해서 웃어주는 것처럼.”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40쪽)

시대적 경향일 것이다. 정치와 선거의 완강한 반-정치적 동력에 한 개인이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합리적 무시나 상호 수동에 몸을 맡기고 말 것인가. 단순한 선택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런 중에도 (바로 그런!) 정치가 삶의 조건과 사회를 쉼 없이 만들어간다는 것이 고민스럽다. 드라마가 된 정치, 상호 수동을 통해 “자발적인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그것은 가짜 해방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폐쇄와 남북한 사이의 긴장, 사드 배치와 미국, 중국과의 관계, 노동개혁,…마음이 아니라 몸, 일상,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치다. 합리성만으로 따져도 무시할 수 없다. 녹음된 반응을 듣고 그저 만족하고 불평하는 것으로 해방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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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몸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면 건강만 한 것이 없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건강관리서비스‘의 ’산업 활성화‘만 봐도 그렇다. 의약품 섭취, 식사, 운동, 술과 담배 습관을 모두 돈벌이 산업으로 키우겠다고 한다. 보건도 상품으로 만들어 민간에다 맡기겠다(민영화)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근대 국가가 존립 근거로 삼아 온 ‘국민’ 건강,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공중보건의 책임까지 버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버림으로써 얻으려 하는 역설의 건강 정치이자 국가 책임의 정치다. 그 바깥으로 피한다고 내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숙명적으로 정치적 삶을 감내해야 한다.

 

어떻게 보더라도 정치를 피할 수 없을 때, 이 난맥, 난장의 선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그리고 국가가 보건의 책임을 회복하는 데에 총선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먼저 몸과 마음에서 ‘한탕주의’를 지우자고 제안한다. 한 번의 선거를 통해 모든 것을 얻거나 잃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사회적 실천의 성과는 대부분 점증이고 점진, 그리고 지루하고 고단한 축적이다. 이번 선거 또한 길게 이어지는 ‘선’을 구성하는 하나의 ‘점’일 터. 한 번의 투표가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이 효능을 결정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 좋지 않은 결과를 미리 짐작해서, 패배주의의 하나로, 과정을 핑계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선거는 말과 생각, 그리고 이념을 다루는 행위다. 어떤 말이 나오고 여론이 되는지, 무슨 약속을 했고 얼마나 지지를 받는지, 지향이 어떻게 수렴되는지, 미래의 삶과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이런 말과 생각, 실천이 과정을 구성한다.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이며, 결과에 도달하는 축적의 경로이다. 결과를 미리 경험하는 ‘선취’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단지 불평하고 이야깃거리로 삼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고 요구하며 목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잠깐 하고 말 일이 아니라, 생활에 통합하는 것, 그런 점에서 일상의 행동 양식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선거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그렇지만 중요한 기회).

마침 좋은 예가 있다. 그 말썽 많던 경상남도의 무상급식에 새로운 기회가 생긴 것이다. 총선에 나서는 여러 후보가 무상급식을 약속하는 바람에 여당 후보들까지 같은 공약을 내세우게 되었다고 한다(연합뉴스 바로가기). 변화다. 선거와 약속의 결과는 아직 모르지만, 변화의 새로운 힘과 가능성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우연히 이런 일이 생겼을 리 없다. 그동안 지역에서 일상적인 삶의 정치가 작동했고, 그 결과 선거라는 기회를 통해 확장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선거를 예상하여 삶의 정치가 더 강화되기도 했을 터, 그런 점에서 선거는 기회일 뿐 아니라 그 삶의 정치가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선거를 사건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면, 코앞의 정치적 승부만 가치가 있다 하기 어렵다. 더 나은 삶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주장하고 요구하며 조직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승부라 하더라도, 긴 시간을 두고 겨루어야 한다면 과정은 그냥 수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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