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도 건강권이다”라는 제목으로 <서리풀 논평>을 쓴 때가 2015년 4월 (바로가기),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외국에서 큰 사고가 일어난 것이 계기가 되었으니, 다들 독일 저먼윙스 여객기 추락 사고를 기억할 것이다. 우울증 병력을 가진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기를 추락시킨 것으로 밝혀졌고, 그 때문에 그의 정신병력이 논란이 되었다.
오늘 다시 정신건강을 짚는 것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이다. 정신건강, 그 중에서도 만성 정신질환이 연이어 관심 대상이 되고, 안타깝게도 사회의 반응과 논의, 대응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만큼 지체 현상을 보이는 일이 또 있을까 생각하면, 역시 정신보건은 ‘마이너리티’를 면치 못한다.
먼저, 그 유명한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가해자는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았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았다. 경찰은 정신질환을 사건의 동기로 결론지었고,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서 ‘안전’을 위해 정신질환자를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직도 이런 형편인가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신질환자를 찾기 위해 체크리스트를 개발하겠다는 계획도 황당하지만, 당장은 ‘우범’ 정신질환자에 대한 ‘행정입원’ 추진 방침이 더 큰 문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나서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제동을 걸 정도다(바로가기).
용인정신병원 사태를 계기로 다시 드러난 의료급여 만성 정신질환자의 치료와 처우 문제도 전혀 가볍지 않다(라프르시안 기사 바로가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고질적 문제지만, 병원 노조가 설명한 의료급여 환자의 차별은 다시 놀랍고도 아프다.
“건강보험 환자가 입원한 병동에는 24시간 온수가 공급되지만 의료급여 환자 입원병동에는 아침, 저녁 1시간씩 제한적으로 온수가 공급됐다. 환자복도 건강보험 환자는 매일 교체가 이뤄졌지만 의료급여 환자는 환자복이 찢어질 때까지 입어야하고, 찢어지면 반바지로 만들어서 제공했다.
환자들의 식사 질에서도 차별이 이뤄졌다. 건강보험 환자는 당뇨식, 저염식 등의 치료식을 제공한 반면 의료급여 환자는 치료식이 제공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환자들이 배식해서 나누어 먹어야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병원의 인력 부족으로 인해 의사의 작업치료의뢰도 없이 입원환자에게 청소와 세탁물 수거, 배식 등의 업무를 시켰고, 심지어 이사장이 키우는 개를 관리하게 하거나 기숙사 공사 등의 작업에 동원하기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문제가 터져 나온 길은 다르지만, 고민은 한군데로 모인다. 만성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는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완강한 ‘실용’의 시대에 비현실과 비실용의 도전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본 원칙은 혼란스러울 것이 없다. 우리는 사회적으로도 (그래야 마땅한 ‘규범’으로는) 어느 정도까지 이해와 합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또 문제가 된 정신질환과 범죄와의 연관성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는 방향이 잡혀 있으니 국가인권위원회가 바로 나설 수 있었다.
핵심 원칙은 바로 ‘건강권’이다. 인권을 중심 가치로 두는 입원 치료, 그리고 지역사회에서의 적극적인 재활과 사회복귀를 한꺼번에 묶는 가치가 바로 건강권이 아닌가. 각론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총론으로서의 건강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은 건강권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이에 도전한다. 만성 정신질환자와 정신장애인의 인권은 동요하고 깨지기 쉬운 ‘약한’ 권리라는 점이 특히 그렇다. 그 사이 우리가 당연하고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면, 건강권은 ‘실현’되어야 하는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전진해야 하는 연속적 사건이다.
정신질환과 정신장애에서 구체적인 조처와 프로그램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을 보장하면서도 신속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의료급여 환자에 대한 치료의 질은 획기적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몇십 년째 말만 그럴싸한 지역사회 재활과 복귀도 이제 다른 차원으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원칙 못지않게 이 또한 불안정한 것이 문제이자 과제다.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 때부터 말했으니, 지역사회 재활과 복귀를 중요한 한 가지 목표로 삼은 지 20년도 넘었다. 입원 치료를 둘러싼 인권 문제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고, 8년째 묶여 있다는 의료급여의 정액 진료비는 폭발 직전이다.
기왕 거론했으니, 한 가지 문제는 좀 더 자세하게. 의료급여 정신질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급하다. 의료급여의 진료비 방식과 수준(수가)은 물론, 정신병원의 공공성과 지역사회 재활의 준비 태세, 가족과 사회의 인식까지 얽혀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인용한 것과 같은 차별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2008년에 개정된 현행 정신질환 의료급여 수가 기준은 1일 진료비가 2770원에 불과하고, 정액 수가제이기 때문에 어떤 진료를 받아도 지원받을 수 있는 상한선이 2770원인 셈이다. 이는 건강보험 수가(1일 2만7704원)의 10분의 1 수준으로, 같은 진료를 해도 병원이 받는 수가가 달라 의사들조차 의료급여 환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긴다. 한 알에 약 3000원 정도 하는 알약을 처방해도 병원과 환자 모두에게 경제적으로 손해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의료급여 대상자들이 좋은 약을 처방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한겨레신문 기사 바로가기)
이처럼 정책과 제도, 프로그램이 흠이 많고 불안정한 직접 이유도 어렵지 않다. 과학 지식과 정책 방향이 불확실해서가 아니다. 정책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을 동원하면, ‘자원배분의 우선순위’가 떨어지고 그 결과 모든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더 크다.
건강보험 수가에 비할 바가 아니니 대표적인 치료약도 꺼리게 만들 정도에, 그토록 강조하는 지역사회 재활은 흉내도 내기 어려운 지경이 아닌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니 정책 당국자도 잘 알지만, 관심과 지지는 약하고 압력과 동력은 미약하다.
결국 정책과 기술의 차원을 떠나 정치와 사회로 진입했다는 뜻. 따지고 보면 자원배분과 우선순위란 결국 정치가 아닌가. 국방과 복지에 얼마나 많은 예산을 쓸 것인가. 대기업과 빈곤층을 왜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가 모두 여기에 달렸다. 정신질환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정치와 사회란.
정치와 사회의 렌즈로 정신질환을 보면, 건강권이야말로 모든 사회적 실천의 바탕에 자리 잡는 중심이다. 배제와 차별에 저항하는 더 강한 인간 정신이 따로 있을까? 세계와 국민국가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한에서는 더욱 대안을 찾기 어렵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강조한다. 정신질환과 장애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산성과 인적 자원, 의료비 지출, 경제성장, 사회 안전 따위의 다른 가치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정신 건강을 회복하고 유지하며 악화를 예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