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지난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 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19세 젊은 청년이 열차에 치어 사망했다. 이와 유사한 사고는 2013년 1월 성수역, 2015년 8월 강남역에서도 발생하였고 그 때마다 젊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갔다. 더 이상의 유사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근본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구의역 사건을 계기로, 사망한 청년의 열악한 근무 환경 현실 일부도 알려졌다. 현장에서 수리를 담당하는 인력이 적고, 고장 신고 후 1시간 이내에 신고가 발생한 역으로 출동해야하기 때문에 식사를 제때하기 어렵고, 그나마 구석진 곳에서 가능한 점심 식사마저도 컵라면으로 서둘러 끼니를 때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청년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보여주는 일상의 단면이다.
이처럼 노동자의 건강과 안녕은 ‘직업의 질(job quality)’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직업의 질은 크게 노동자가 수행하는 업무와 관련된 ‘업무 특성’과 ‘고용의 질(employment quality)’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업무 특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업무에 대한 재량권이 낮은 노동자는 재량권이 더 많은 이들에 비해 정신 건강이 더 나쁘고, 심혈관 질환 등 질병 발생 위험이 더 높다는 것은 정설이다.
‘업무 특성’과 더불어 고용 안정성, 임금 수준, 노동 시간 등으로 대표되는 ‘고용의 질’ 또한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주지만, 기존의 ‘고용의 질’과 노동자의 건강에 관한 연구들은 ‘고용의 질’과 관련된 다양한 특성 가운데 일부만을 대상으로 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였다.
반면 ‘고용의 질’과 관련된 다양한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것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노동자 개인이 경험하는 다양한 노동 환경을 포괄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인식 하에,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학교의 카렌 반 에어든과 스페인 폼페우파브라 대학교의 공동 연구진은 15가지 변수로 측정한 전반적인 ‘고용의 질’ 수준이 노동자의 직업에 대한 불만족, 전반적 건강,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관련 자료 : How does employment quality relate to health and job satisfaction in Europe? A typological approach. Social Science and Medcine)
분석에 사용한 자료는 제5차 유럽 근로 조건 조사(the 5th wave of the European Working Conditions Survey) 자료로, 유럽연합(EU) 산하 통계 기관인 유로파운드(European Foundation for the Improvement of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가 1990년부터 5년마다 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사용한 2010년 자료는 유럽연합 34개 국가에 거주하는 15세 이상 4만3816명의 면대면 조사 자료이며, 연구진은 이 가운데 군대에 종사하는 이들을 제외한 후, 27개국에 거주하는 2만7325명에 관한 자료를 분석하였다.
먼저 연구자들은 ‘고용의 질’의 다양한 속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7개 차원, 15개 변수를 활용하여 ‘고용의 질’ 지표를 구성하였다.
① 고용 안정성(고용 계약상의 고용 기간)
② 물질적 보상(임금 수준, 임금 이외 급여)
③ 노동자 권리와 사회적 보호(보상받지 못하는 초과 근무)
④ 노동 시간(장시간 노동, 근무 일정 변경 미리 알림 여부 등)
⑤ 교육 기회(훈련 기회 제공)
⑥ 집단 조직(직업 관련 건강 및 안전 이슈에 대한 정보 제공, 노동 시간 결정 과정 참여, 노동자 대표의 존재)
⑦ 개인 간 권력 관계(노동자 참여, 사업장 내 회의, 학대)
이를 토대로, 조사 대상자의 ‘고용의 질’은 다음과 같이 5가지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1. 표준 고용 관계(SER)와 유사한 직업 : 고용 조건 및 고용 관계가 전반적으로 좋은 특성을 가지며 고등 교육을 받은 노동자, 숙련도가 높은 사무직 노동자 등이 상대적으로 이러한 직업군으로 더 많이 분류된다. (Standard Employment Relationship(SER)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유럽에서 널리 적용되었던 고용 원칙으로 상근직, 정년 보장, 가족 수당, 복지 급여, 강력한 법적 보호, 정규 시간 근무, 경력 개발 기회를 보장하였다.)
2. 도구적 직업(instrumental job) : 보통의 노동자와 사용자 간 계약 관계와 유사한 고용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표준 노동 시간에 따라 근무하며 고용과 임금 수준이 안정적이지만 보상이 제한적이고 훈련 기회가 부족하며, 열악한 고용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산업체에 근무하는 노동자, 숙련된 육체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이러한 직업군으로 더 많이 분류된다.
3. 불안정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직업(precarious unsustainable job) : 고용의 질 전반에 걸쳐 상대적으로 열악하며, 특히 저임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단시간 근무 형태로 고용될 가능성이 높은 고용형태이다. 여성, 저숙련 사무직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이러한 직업군으로 더 많이 분류된다.
4. 불안정하고 노동 강도가 높은 직업(precarious intensive job) : 고용의 질이 전반적으로 열악하며, 특히 근무 일정의 예측 가능성이 낮고 장시간 노동, 보상받지 못하는 초과 근무를 특징으로 하는 고용 형태이다. 젊은 노동자, 육체 노동자,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자, 농업 부문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이러한 직업군으로 더 많이 분류된다.
5. 포트폴리오형 직업(portfolio job) : 전반적으로 좋은 고용 조건과 고용 관계를 특징으로 하지만 장시간 노동, 규칙적이지 못한 노동 시간, 보상이 없는 초과 근무 가능성이 높은 고용 형태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노동자와 사무직이 상대적으로 이러한 직업군으로 더 많이 분류된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5가지 유형으로 분류된 ‘고용의 질’에 따라 노동자들의 직업에 대한 불만족(“전반적으로 당신의 노동 조건에 대하여 만족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전혀 만족하지 않는다” 또는 “만족하지 않는다”라고 답한 경우 ‘불만족’으로 분류), 전반적 건강 수준(“전반적으로 당신의 건강 상태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에 “보통”, “나쁨”, “매우 나쁨”이라고 응답한 경우 ‘나쁜 건강 상태’로 분류), 정신 건강 수준(세계보건기구(WHO) 안녕 지표로 측정하여 5점 미만인 경우 ‘나쁜 정신 건강 상태’로 분류)을 비교하였다.
자료에 대한 분석 결과는 ‘표준 고용 관계와 유사한 직업’과 비교하여 나머지 ‘고용의 질’ 분류군이 얼마나 더 직업에 “불만족”하는지(또는 “나쁜 건강 상태” 또는 “나쁜 정신 건강 상태”라고 응답하는지) 정도를 교차비(odds ratio) 형태로 제시되었다. 연구진은 ‘고용의 질’이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효과만을 확인하기 위해 성, 연령, 거주 국가, 업무에 대한 재량권, 작업 속도 등 시간적 압박, 소음과 분진 등 사업장의 물리적 환경 요인, 진동과 작업 자세 등 인체 공학적 요인들을 보정하여 자료를 분석하였다.
먼저 ‘직업에 대한 불만족’과 ‘나쁜 건강 상태’는 ‘불안정하고 노동 강도가 높은 직업’이 기준 집단의 각각 5.39배, 1.77배로 가장 높았다. ‘나쁜 정신 건강 상태’는 ‘불안정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는 직업’이 기준 집단의 1.58배로 가장 높았다([표 1]). ‘고용의 질’에 따른 건강 영향은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불안정하고 노동 강도가 높은 직업’에 해당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나쁜 건강 상태’인 비율이 더 높았으며, ‘포트폴리오형 직업’의 경우도 여성만이 부정적인 건강 영향을 받고 있었다.
요약하면 ‘고용의 질’이 열악할수록 조사 대상자들은 직업에 대한 불만족이 높고, 전반적 건강 및 정신 건강 수준이 나쁘다고 인식하였으며, 특히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연구자들은 ‘지속 가능한 노동 시장 정책’ 개발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건강과 안녕에 영향을 미치는 ‘고용의 질’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불안정한 직업은 건강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건강한 생활 습관, 좋은 주거, 사회적 보호와 같은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저해하고, 장시간 노동 시간과 초과 근무는 일상생활과 일을 균형 있게 영위하는 것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자의 거주지인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상근직, 정년 보장, 가족 수당, 복지 급여, 강력한 법적 보호, 정규 시간 근무, 경력 개발 기회 보장과 같은 ‘좋은 직장’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에서 벗어난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중 하나인 ‘고용의 질’이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그 결과 노동자의 건강과 안녕이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와 강도는 보다 증가하고 있다. 한정된 ‘좋은 일자리’를 개인 수준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취하려는 노력을 넘어, 사회 전반적인 ‘고용의 질’ 수준을 향상시키는 ‘질 좋은’ 노동 시장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촉진되기를 기대한다.
유원섭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