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솔직한 무의식, 올바름을 위한 의식적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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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17일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이 치러졌다. 다수의 객관식 문항들로 구성된 시험 한 번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이 어쩐지 찜찜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런 시험이 그나마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평가자의 자의적 판단이나 부당한 조작이 개입될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최근의 굵직한 입시 부정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의심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자율형 사립고인 하나고등학교에서는 (무려 21세기에!) 남학생을 더 뽑으려고 서류 면접 성적을 바꿔치기했다. (☞관련 기사 : “하나고, 남학생 늘리려 입시 조작” 현직 교사 폭로) 면접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로스쿨 선발 과정에서 면접 위원은 특정 지원자가 고위 법관이나 로펌 파트너의 자제라는 사실을 고지 받았다. (☞관련 기사 : “아버지가 판사” “로펌 파트너”…교육부 ‘불공정’ 감싸기) 최근 월드 스타가 된 어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아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면접장에 들어갔다. (☞관련 기사 : “금메달 뽑아라”…정유라 메달만 반영)

하지만 객관식의 일회성 시험보다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고 심층 인터뷰를 통해 지원자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많은 학교와 기업들이 다면적 평가를 확대하면서 동시에 평가자들의 자의성을 최소화하고 타당한 평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혼이 정상적인 기관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학교육학회지>에 실린 논문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카퍼스 교수 팀은 객관적 평가 노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선발 위원의 무의식적 편견이 입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의 보건의료 전문직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하 흑인으로 표현)을 비롯한 소수 인종이 비율이 낮다. 보건의료 서비스에서 나타나는 인종 간 불평등이 보건의료 전문직의 인종 불평등과 관련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예컨대 환자의 인종에 따라 의사의 상담 태도나 치료 노력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치료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카퍼스 교수 팀은 보건의료 전문직의 인종 불균형 문제가 의대 신입생 선발 과정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신입생 선발에 참여하는 이들의 인종적 편견 수준을 조사한 것이다.

최소한의 염치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놓고 인종 차별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더구나 의대 신입생 선발위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위선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학력 중간 계급일수록 평등 지향,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통상적 설문 조사를 통해서 인종적 편견을 파악하는 경우, 편견 수준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카퍼스 교수 팀이 선발 위원을 대상으로 흑인과 백인 (유럽계 미국인)에 대한 선호를 설문으로 평가한 결과, 여성과 남성, 학생과 교수 모두 특별한 인종적 편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 팀은 이러한 규범적 설문 태도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암묵적 연관성 테스트(implicit association test)’를 시행했다. 이는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흑인과 백인의 얼굴, 긍정적 단어들(예, 사랑스러운, 즐거운, 행복한, 사랑, 기쁨)과 부정적 단어들(예, 모욕하다, 끔찍한, 독, 이기적, 추잡한, 더러운)을 연계시키는 반응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다음 그림처럼, 처음에는 흑인 얼굴이나 긍정적 단어가 나오면 오른쪽 단추, 백인 얼굴이나 부정적 단어가 나오면 왼쪽 단추를 누르도록 정한 후 임의의 순서로 얼굴 사진과 단어를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일정 횟수가 지나면 이제 규칙을 바꾸어 흑인 얼굴이나 부정적 단어가 나오면 왼쪽 단추, 백인 얼굴이나 긍정적 단어가 나오면 오른쪽 단추를 누르도록 한 후, 다시 사진과 단어들을 번갈아 보여준다.

ⓒimplicitharvard.edu

이 때 사진이나 그림이 화면에 나타난 후 단추를 누르는 데 걸리는 반응 시간을 측정하여 그 차이를 평가한다. 백인-긍정적 단어를 연관 짓는 반응 속도가 더 빠른 경우 백인 편향의 선호가 존재한다고 판정한다. 이러한 테스트는 무의식적 편견을 잘 포착하며, 일반 설문 조사에 비해 차별적 행태를 더 정확하게 예측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테스트를 해보면, 바람직한 답변을 하겠다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작위로 화면에 나타나는 단어와 사진에 허둥거리며 단추를 누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가기 : Project Implicit. 이 사이트에서 무료로 검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인종 편견 이외에도 성별, 연령, 장애, 비만 등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 수준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 연구에는 2012~13년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의과 대학 신입생 선발위원회 140명이 익명으로 참여했고, 테스트 결과는 본인에게만 화면에 공지되었다. 연구진은 익명화된 자료를 이용하여 성별, 학생/교수 여부에 따라 비교했다. 연구 결과는 매우 간단하다. 남성과 여성, 학생과 교수진 모든 집단에서 유의한 수준으로 백인 선호 편향이 확인되었다. 특히 남성과 교수들에게서 인종 편향이 심하게 나타났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면접 과정에서 인종적 편향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관련 자료 : Implicit Racial Bias in Medical School Admissions)

그렇다면 이러한 테스트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평가 시행 후에 시행된 설문에서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이러한 테스트가 자신을 돌아보고 편견을 줄이려 노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응답했다. 절반 정도는 그 다음 해 면접 과정에서 자신의 테스트 결과를 염두에 두고 편견이 작동할 가능성을 경계했다고 진술했다. 말하자면, 나 스스로를 앎으로써 성찰하고 경계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선행 연구들은 의사든 의사가 아니든 흑인에게서 인종적 편견이 적다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연구 결과, 또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여성과 젊은 학생들일수록 무의식적 인종 편견이 적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신입생 선발위원회에 여성, 흑인, 학생을 많이 포함시키는 것이 보다 공정한 평가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회의 지배적 문화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젠더 불평등이라면 치를 떠는 필자도 조카에게 ‘남자애가 무슨 엄살이야’ 하고 내뱉고 스스로 책망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위해 시험 삼아 해본 암묵적 연관성 테스트에서는 ‘중간 정도의 (moderately) 백인 선호’가 있다는 결과를 받았다. 건강 불평등 연구자인 내가, 인종 차별을 그렇게 비판하던 내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니….

하지만 논문이 이야기한 것처럼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교정하는 데 의식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제도적 차원에서는 균형 할당제나 입시/인사위원회의 인적 구성 다양화 등 실질적 대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뉴스를 보고 있자면, 무의식적 편견 문제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놓고 인종적, 성적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는 이가 제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의 ‘1+1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노골적인 여성 혐오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혼세 마왕의 출현이나 대홍수를 기다리기보다는 비판과 성찰의 힘을 믿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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