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민주주의, 건강에도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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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보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① 민주적 기본 가치 회복 ② 민주시민 의식의 제고 ③ 시민의 실천 ④ 제도, 시스템의 개선 보완 ⑤ 비민주적 행태에 대한 감시와 처벌 ⑥ 민주주의 법, 제도의 구현 ⑦ 국민주권 원칙의 재확립 ⑧ 민주주의 확장.”
‘왜 촛불을 들었는지, 촛불로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를 묻는 ‘온라인 촛불 토론’ 답변을 고르다가, 문득 누구도 ‘시민의식’ 타령을 하지 않는, 모두가 ‘제도와 시스템이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 새삼 다가왔다. (☞바로 가기)

그야말로 제도 민주주의의 결함을 시민 행동이 메우고 있는 요즈음, 민주주의와 건강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 최신 연구 한 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Aix-Marseille) 대학교의 Marwân-al-Qays Bousmah 박사 등 연구진이 지난 8월 <건강 정책(Health Policy)>에 발표한 “의료와 민주주의: 보건 지출과 건강 결과 사이의 관계에서 ‘제도의 질’의 중요성”이라는 논문이다. (☞바로 가기)

기존 연구들에 따르면, 높은 건강 수준을 보이는 국가들 가운데서도 보건 지출의 수준은 다양하며, 국가 보건 지출의 수준은 인구집단의 건강 수준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맥락적, 제도적 요인을 고려하는 경우 보건 지출 수준의 영향은 더욱 미미하다고 알려졌다.

연구진은 “맥락적, 제도적 요인이 보건 지출을 통한 건강 결과 달성을 방해할 수 있다”는 기존 연구 결과가, 2011년 ‘아랍의 봄’과 이후 ‘아랍의 겨울’을 겪고 있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지 확인해보고자 했다.
총 18개 국가의 1995년부터 2012년까지의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 기간 이들 국가는 무려 36.8%의 인구 증가를 겪었지만, 기대수명 증가는 6%에 불과했다. 인구 당 보건 지출은 무려 78.8%나 증가했지만, 국가 간 건강 불평등이 23%나 증가했다. 이는 국가마다 기대수명 증가의 속도가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약 20년 동안의 보건 지출 증가가 국가마다 서로 다른 건강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연구진은 국가 보건 지출 수준 (인구 당 보건 지출)이 인구집단 건강 수준 (출생 시 기대수명)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도의 질’ 로서 ‘민주주의 수준’의 영향을 보기 위한 패널 회귀 분석 모형을 설계했다. ‘민주주의 수준’으로는 국제비영리기구 프리덤 하우스 (Freedom House)가 매년 산출하여 발표하는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 (political rights and civil liberties)’ 지표를 사용했다. (☞바로 가기) 그 외 인구 당 GDP, 합계 출산율, 도시 인구의 비중, 전쟁, 시간에 따른 변화 등 거시적 건강 결정 요인들의 영향을 보정했다.

<그림> 주어진 민주주의 수준에서 국가 보건 지출이 인구집단 건강 수준에 미치는 효과

▲ (왼쪽 그림) 가로축은 인구 당 보건 지출, 세로축은 출생 시 기대수명의 예측 값. (오른쪽 그림) 가로축은 민주주의 수준, 세로축은 인구 당 보건 지출이 출생 시 기대수명에 미치는 평균 한계 효과. ⓒBousmah 등 (2016)

분석 결과, 민주주의 수준이 높을 때 (=1)는 보건 지출이 증가함에 따라 기대 수명도 증가하지만, 민주주의 수준이 낮을 때 (=7)는 보건 지출이 증가함에 따라 기대 수명이 오히려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왼쪽 그림).
저자들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보건 지출이 건강 결과에 미치는 효과가 궁극적으로 보건 의료 자원을 배분하는 ‘제도의 효율’에 달려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프리덤 하우스 지표로 측정된 민주주의 수준 (제도의 질)은 정부가 자원 배분에 관한 결정을 더 효율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시민들이 의견, 필요, 선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정도를 측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보건의료 영역에서는, 기반 시설에 대한 지출, 1·2·3차 의료의 배분, 보건의료 시설의 지역적 분포 등이 자원 배분에 있어 중요한 결정 사항이다. 이는 보건의료 서비스의 질과 그에 대한 접근, 나아가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편 오른쪽 그림을 보면, 민주주의 수준이 높을 때 (=1)는 보건 지출이 기대수명에 미치는 효과가 양(+)의 값을 갖지만, 민주주의 수준이 낮아질수록 그 효과는 점차 감소하여 일정 수준 이하의 민주주의 하에서는 음(-)의 값까지 갖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건 지출의 증가가 건강 결과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민주주의 수준이 충분히 높은 한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보건 지출의 증가가 건강 수준을 개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필수적 지출까지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보건 지출의 증가는 건강 결과 개선을 위한 필수적이지만 충분치 않은 조건이며, 그 자체로 본질적 가치를 갖는 민주주의는 보건 지출의 효율적 사용을 담보하는 도구적 가치 또한 지닌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요즈음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때문에 사장된 이슈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지난 5일 발표된 통계청 자료는 과연 ‘촛불 이후, 우리가 만들고 싶은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관련 기사 : 빈곤층 지갑만 얇아져…하위10% 가처분소득 감소율 사상 최대)
월 소득 하위 10% 이하인 최극빈층의 지난 3분기 가처분소득이 2003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는 발표였다 (전년 동기 대비 –16%). 이들 가구의 월평균 가처분소득은 71만7000원. 소득에서 세금·연금·보험료 등 비소비지출을 빼고, 의식주 생활을 위해 한 가구가 실제로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이 71만7000원이라는 것이다. 이 와중에 2017년 예산에서 국민건강보험 국고 지원액은 전년보다 2210억 원이나 감액 편성됐다. (☞관련 기사 : 박근혜 정부, 이 와중에 국민건강보험 죽이기)

전 세계적 경제 위기였던 2008~2009년을 제외하면, 한국의 보건 지출은 200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해 왔다. 반면 공적 보건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이래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평균 건강 수준은 증가하고 있을지 몰라도, 건강 불평등은 뚜렷이 개선되지 않거나 도리어 악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이 정권이 ‘오직 1%만을 위한 의료’를 추구해왔다는 점을 확인했다. (☞관련 기사 : 박근혜 의료 민영화, 1%의 ‘회춘’을 꿈꿨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시민의 힘으로, 이러한 제도와 시스템을 뜯어 고치고자 나섰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제도와 시스템. 그것은 적어도, 누구나 공평하게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모두가 건강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김선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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