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또다시 ‘성장’을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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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탄핵될지 확언할 수 없지만, 헌법재판소가 상식적으로 결정하리라 믿는다. 탄핵이 인용되면 60일 이내에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하니, 일 진행은 금방이다. 예상대로 된다면, 관심과 걱정이 곧 대통령 선거로 모일 것이다.

 

탄핵 결정도 안 났는데 벌써 대선 이야기라니,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이해한다. 반동과 역진의 기운도 심상찮으니 당분간 탄핵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끝까지 긴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대적으로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 바, 탄핵 이후(정확하게는 탄핵에 이어지는) 대통령 선거 또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십중팔구 시간이 모자라게 생긴 것이 첫째 이유다. 탄핵이 결정되면 각 정당이 경선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채 한 달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일사천리와 주마간산이 뻔하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선거가 으레 바람과 분위기를 타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사정이 더 나쁘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개인을 검증하고 (개인적, 집단적) 비전을 ‘사회화’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탄핵 이후 제도 정치는 자칫 형식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우리는 탄핵과 대선 국면에서 ‘새로운’ ‘체제’를 논의하고 그를 바탕으로 제도정치를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탄핵을 중심으로 시민의 열망이 결집했지만, 그 동력은 그냥 새로운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 아니지 않았는가.

 

광장에서 터져 나오는 자유발언을 들어보면, 사람들과 그 정신은 도도한 물결과도 같이 새로운 사회를 바라고 요구한다. ‘선수 교체’가 아니라, 몇몇 사람과 집단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체제를 개혁하자고 한다. 대선이 단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것으로 끝나면, 광장에 모인 민심,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는 실패하는 것이다.

 

왜 대통령 선거인가? 대통령 선거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과 동력이 만들어지고 모이며 표출되는 제도적 장치다. 물론, 시민의 뜻을 온전하게 대신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기간이 짧고 여유가 없으니 분위기에 휩쓸려 지나갈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게이트가 남긴 영향으로 모든 약속이 반(反)-박근혜를 넘지 못할까도 불안하다.

 

괜한 걱정이 아니다.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추상적인 구호만 난무하고, 우리의 사회적 삶을 관통하는 시대적 과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 노인과 청년의 불안하고 불평등한 삶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전망하기도 어려운 경제는? 일자리와 비정규 노동은? 다들 그렇게 문제라고 주장하는 저출산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은? 더구나 이 모두를 포함하는 미래 사회의 비전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물론, 다들 몰두하는 개헌과 권력구조는 박근혜 정권의 참담한 실패를 반성하는 차원이라 빼놓기 어려울 것이다. 한걸음 앞서 문재인 전 대표가 꺼낸 것처럼 권력기관 개혁도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음 대통령, 다음 정권이 해야 할 일이 새로운 체제에 대한 것이면 이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대통령 선거는 권력과 정부는 물론 체제를 재조정하는 큰 정치적 기회다. 더구나 이번은 탄핵사건까지 더했으니, 토대에 근접하고 그런 점에서 체제적일 수 있다. 조건과 상황이 어렵다지만, 적어도 4~5년 동안은 오지 않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첫걸음으로 대선 후보들에게 새로운 체제에 대한 비전을 요구한다. 무슨 수당을 얼마 올리고 어디다 무엇을 만들겠다는 수준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시시콜콜 정책들은 어차피 곧 내놓을 것이 아닌가. 멀리 봐서 한국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것을 위해 다음 5년간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미리 말하지만, 시민을 ‘지도’할 비전과 이념, 철학을 내놓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시없는 기회에, 시민과 토론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초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첫 번째 역할이자 책임이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이 지금 이 시기의 정신이라면, 그 체제는 바꾸고 버려야 할 낡은 체제를 디딘 채 또 탈출해야 한다. 극복 대상인 구체제(앙시앵 레짐)는 바로 ‘박정희 체제’와 ‘1987년 체제’라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전혀 일치하는 시기가 없는 두 체제를 구체제라 하는 것은 그 체제들이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동질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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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버리고 극복할 것인가? 구체제들이 완전하게 공유하는 것, 그만큼 완고하고 지속적이어서 사람의 내면까지 지배하는 정신이자 권력. 새로운 체제가 넘어서야 하는 핵심이면서도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성장 패러다임이다. 경제 성장은 박정희 체제 이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적어도 50년 이상을 지속해 온 시대정신이다.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로 이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실용적 이유. 어떤 방법으로도 과거와 같은 뜻의 성장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 경제의 구조가 그렇지만, 꼭 한국만의 사정도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다 국제 경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자리도 과거와 크게 다르다.

 

가만히 있으면, 또다시 제2의 녹색경제나 창조경제 같은 ‘주술’로 시민이 헛갈릴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도 말만 바꿔 ‘동반성장’이나 ‘내포적 성장’, 또는 ‘제4차 산업혁명’을 앞세우고, 대상만 바꿔 인공지능, 생명바이오, 신약, 정밀가공 등을 ‘신화’로 만들까 걱정이다.

 

다시 몇 퍼센트 성장률과 몇만 달러 소득목표만 힘을 얻으면 비관적이다. 또 한 번 성장동력이라 포장해야 하고, 지식기반경제, 부가가치, 문화산업, 원격의료와 의료서비스 산업과 같은 ‘경제적 가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박정희 체제, 그리고 1987년 체제까지도 목표이자 삶의 양식이었던 몸집 불리기는 더는 가능하지 않다. 모든 대선 주자들은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새로운 경제체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비전을 내기를 바란다.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실용일 뿐 아니라 가치이자 윤리이기도 하다. 성장을 금과옥조로 삼은 구체제는 우리에게 경제 ‘제국주의’를 유산으로 남겼고, 그만큼 우리는 ‘비인간적’이 되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는…성장의 달성 방법에 대해 결코 고민하지 않는다….체르노빌, 광우병, 오염된 혈액제제 등의 배경에는 부주의, 규정을 어기는 것, 법 위반 등이 있다.”(세르주 라투슈, <탈성장 사회>, 양상모 옮김, 오래된생각 펴냄).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는 이런 경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연결된다. 그뿐인가. 우리 또한 이런 비전이나 철학을 내면화하고 있었다면, 새로운 경제체제는 우리 모두의 삶이 좀 더 인간화되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번 대선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둘러싼 경쟁과 각축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보다는 성장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경쟁해야 한다. 핵심은 어떤 새로운 성장이 아니라 성장과 결별하는 것이다.

 

“성장 사회와의 결별은 사회관계와 ‘정치적인 것’을 되찾기 위해 경제 성장과 경제 발전, 즉 경제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한다.

 

주권자의 지금 생각이, 그 욕망이 어떻다고 핑계 삼지 말라. 정치 리더십이란 현실에 반걸음 앞서가면서 사람들의 삶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제 역할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경제와 사회, 한국인의 삶이 대안 경제와 그 체제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곧 모든 (잠재적) 대통령 후보들의 경제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것을 내놓으면, 우리도 토론에 참여할 용의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은 이런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공생적 탈성장과 지역주의’(세르주 라투슈, <발전에서 살아남기>, 이상빈 옮김, 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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