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건강 형평성 정책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맞설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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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한국 사회에서 건강 불평등 문제는 좀처럼 정치적 의제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일부 선언적 수준의 정책 이외에 구체적으로 논의되거나 시행된 것들은 거의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보다 앞서 건강 불평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시작되었던 서구 사회는 어떨까? 건강 형평성을 목표로 내세운 정책들은 건강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강력하게 맞서고 있을까?
실망스럽게도, 펜실베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 정치학 교수 줄리아 린치(Julia Lynch)가 최근 발표한 논문은 ‘그렇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관련 자료 : Reframing inequality? The health inequalities turn as a dangerous frame shift)

이 논문은 건강불평등 문제 해결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던 유럽 국가들의 건강 형평성 정책들 중,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근원적 접근을 시도했던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는 진단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건강불평등 완화라는 취지 아래 대부분의 정책들은 의료적 대응으로 제한되거나 개개인의 건강행동 변화를 목표로 삼는 사업과 프로그램들로 귀결되었다. ‘소득 불평등 감소’를 국가적 건강불평등 완화 수단으로 앞세웠던 나라는 노르웨이 뿐이었다(아래 상자 참고).

건강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적 불평등 완화 – 소득 정책

건강의 체계적 불평등이 사회의 자원 분배 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면, 사회는 분배를 보다 공정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 목표: 경제적 불평등 완화

– 인구 집단의 경제적 불평등 감소

– 빈곤 퇴치

– 모든 사람들의 경제적 안정성 보장

◆ 정책방안 : 노르웨이 정부는 …

– 더 공정한 소득 분배를 보장하는 세금부과 체계를 갖추 기 위해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 소득 불평등 추이를 모니터링 해나가겠습니다.

– 빈곤 철폐를 위한 여러 수단들 (정부 보고서 9. 고용, 복지, 포용 및 빈곤 퇴치를 위한 행동 계획 참고)을 감행해 나가겠습니다.

(노르웨이 정부가 제시했던 “건강의 사회적 불평등 완화를 위한 국가 전략 보고서 20 (2006~2007)” 중 소득 부분 요약.) (☞관련 자료 바로 가기)

수많은 연구 논문들이 건강 불평등 문제의 핵심이 소득과 교육 격차 같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있다고 지적해 왔다. 그런데도 이것이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근거가 불충분해서라기보다 “근거에 기반한 정책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었다. 건강 불평등 문제가 이리도 심각한데 왜 강력한 사회 불평등 완화 정책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
저자는 그 이유를 찾고자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벨기에, 핀란드, 프랑스, 영국, EU, WHO 유럽지부의 보건의료계열 정책입안자 84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시행했다. 또한 건강 불평등을 주제로 삼은 정책 문서, 건강불평등 정책 도입의 장벽에 대한 문헌들을 바탕으로 내용 분석도 실시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을 지목하게 되었다.
첫째, 건강 불평등의 정치 프레임에서는 “불평등의 의료화”를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료화(medicalization)란 의료 영역 밖에 있던 것들이 의학적으로 규정되고 관리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현대 의료는 생의학에 기반을 두고 있어 질병의 생물학적 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사회적 속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건강불평등 또한 “의료” 문제로 부각되고 강조되면, 부의 재분배, 노동시장 규제 같은 사회구조적 불평등 완화 조치들은 해결책으로 수용되기 어려워진다. 개개인의 생물학적 특징, 행동, 의학적 치료에 중점을 둔 정책들이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건강에 대한 생의학적 훈련을 받고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이해하는 인력들이 보건정책을 주도하는 관료나 전문가 집단을 구성하는 경우, 혹은 정책결정자들이 사회적 요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더라도 기존의 의사결정 방식을 뒤따르도록 만드는 경로 의존성이 강력한 경우, 이러한 의료화 현상은 심각해진다.
둘째, 건강 불평등 문제의 복잡성 자체가 근원적 처방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건강 불평등은 여러 사회적 요인들이 전 생애 과정에 걸쳐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교육, 노동, 복지 등 여러 부문을 포괄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다보니 특정 정책을 촉발시키고 추진해나가기 어려우며, 어떤 개입의 결과와 효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이 커진다. 그러다보니, 개인 행동 수정이나 의학적 개입 같은 가시적이고 ‘간단한’ 조치를 선호하게 된다.
셋째,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 건강에 해로운 제품들을 판매하려는 기업들의 시장 개방 압력, 의료 서비스의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무역협상 등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힘들이 정책 영역을 압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 불평등을 완화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은 효과를 발휘되기 어려워진다.
저자는 이같은 불리한 조건들 때문에, 건강 불평등을 내세우며 사회 불평등 완화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경제적 불평등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논하는 정공법이 ‘전략적으로’ 낫다고 결론지었다.
건강 불평등이 아직 정책 의제가 되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구체적인 정책 수립과정과 내용의 한계를 지적한 이 연구의 결론은 암울하고 답답한 미래 전망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건강 형평성 정책들을 좌초시키는 요인들로 의료화, 중재의 복잡성, 신자유주의 정책기조 등을 확인한 것은,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 주의를 해야 하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비해야 하는지 단서를 주기도 한다.
대선이라는 정치적 기회의 창, 그것도 보기 드물게 시민적 힘으로 이러한 기회의 창이 활짝 열렸다. 그럼에도 건강 불평등은커녕 사회 불평등 문제 자체가 아직 쟁점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관련 자료 : 대선에서 불평등 이슈가 사라진 이유). 하지만 비관할 필요는 없다. 불평등과 관련한 기존 정책의 그림자가 약하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강점이 될 수도 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예 새로운 정책을 펴나갈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촛불을 통해서 시민적 힘의 강력함을 정책 결정자들이 깨달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럽 국가들의 ‘점진적’ 대안을 넘어서는 강력한 불평등 완화 전략이 탄생할 수도 있다. 촛불이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회원 오로라


  • 서지정보
Lynch, Julia. “Reframing inequality? The health inequalities turn as a dangerous frame shift.” Journal of Public Health (2017).
Norway Ministry of Health and Care Services. “National strategy to reduce social inequalities in health” Report No. 20 to the Storting 2006-200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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