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누가, 어떻게,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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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돈을 어디다 어떻게 쓰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다. 정부조직 개편으로 부처 이름이 바뀌고 무엇을 없애는 것, 사무실을 이사하는 데 쓰는 ‘푼돈’은 사실 돈도 아니다. 삶과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특히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일수록, 돈이 많이 든다!

 

많은 대선 주자들이 검토한다는 ‘아동수당’을 보자. 나이를 어떻게 하는가, 얼마나 많이 지급할 것인가에 따라 필요한 액수가 달라지지만, 1년에 적게는 5조부터 많게는 25조까지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상병수당’도 마찬가지다. 최근 열린 한 토론회에서 가천대학교의 임준 교수는 “질병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을 때” “건강보험료 재정을 활용해 ‘상병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사 바로가기). 얼마나 돈이 필요할까? 그는 평균 임금의 70%를 보전한다고 할 때 1년에 최소 2조 8천억 정도의 돈이 든다고 추산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기본소득’은 또 어떤가? 기본소득에는 워낙 다양한 방식이 있어 일률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다. 그중 한 가지, 기본소득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재명 후보의 셈으로는 1단계(부분적 도입)에 약 28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기사 바로가기). 더 엄청난 돈이다.

어디 ‘복지’만 그런가. 일자리나 비정규 노동 같은 경제, 산업, 노동 정책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군 장병의 처우를 개선하려 해도, 과학기술을 진흥하려 해도, 공짜가 아니다. 그 ‘악명’ 높은 한국 교육을 바꾸는 대부분 정책, 예를 들어 대학 등록금 문제도 돈 없이는 되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사람이 조금만 용감한 약속을 해도 포퓰리즘, 선심성, 비현실적 등등의 이야기를 듣는 이유다. 익숙한 틀로 생각하는 한, 정권을 바꾸어 새로운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 그 누구도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만 약속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얼마나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하는가가 문제다. 어디서 갑자기 석유라도 터지지 않는 한, 재원은 빤하다. 일부러 안 쓰고 남겨놓았던 것이 있으면 모를까, 쓰는 곳을 바꾸든지 새롭게 재정을 불려야 한다. 공통점은 어느 쪽이든 쉽지 않다는 것.

 

 

첫째, 어딘가 (숨어)있는 재원을 잘 찾아 쓰는 것. 새로 돈을 걷는 과정에 따르는 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만, ‘예외적’ 방법이라는 것이 단점이다. 이런 재원이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지만, 예상대로(!) 거의 없다.

지금 국민건강보험이 20조 이상의 여윳돈을 쌓아 놓은 것은 드문 경우다. 이런 돈을 재원으로 보면 쉽고도 어렵다. 앞서 말한 상병수당 도입은 건강보험 흑자를 활용하자는 제안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본인 부담을 줄이자는 여러 주장이 이 재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좋은 곳에 쓰자니 안정적 재원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곧 적자로 돌아선다는 이른바 건강보험의 ‘재정고갈론’은 상당 부분 과장이라고 하지만(기사 바로가기), 보험료를 어떻게 정하고 걷느냐에 따라 흑자가 크게 변동하니 불안정한 재원임이 틀림없다. 장기간 지속해야 할 정책이면 지금 남아 있는 돈 말고도 새로 재정계획을 짜야 한다.

 

둘째, 용도를 바꾸거나 아껴 써서 새로운 재원을 확보하는, 이른바 ‘구조조정’. 세금이든 보험료든 돈을 더 걷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출 구조를 바꾸자는 것으로, 말대로만 되면 수입이 느는 것과 효과가 같다.

이재명 시장이 추가 재원 없이 제1단계 기본소득을 시행하겠다는 방법이다. 그는 연 400조에 이르는 정부 예산을 ‘구조조정’하면 28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주장한다. 국가 예산의 수입과 지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예를 들어 4대강 사업이나 엉터리 토목공사), 터무니없다고만 할 수 없다.

담뱃세로 늘어난 건강증진기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논란도 비슷하다. 건강증진사업을 확대하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면, 건강증진기금 지출 구조를 조정해서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기사 바로가기).

기본소득이든 건강증진기금이든 기존 재원의 구조를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문제는 그런 돈을 쓸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닌데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점이다. 한 가지 정책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을 넘어 시스템 전체의 재정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세 번째 방법이 돈을 더 걷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가장 간단한데, (1) 비과세 제도 정비와 지하경제 양성 같은 ‘조세 기반 확대’와 (2) ‘증세’ 방안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박근혜 정권이 내세운 정책과 그 경험으로 결론이 난 것, 그것만으로는 재정을 감당할 수 없다(기사 바로가기). 남은 것은 증세다.

우리는 증세에 찬성한다. 아니 불가피하다고 본다. 법인세와 소득세는 많이 논의되었으니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현실적’인 증세 논의는 다음 글을 참고할 것),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이재명 시장이 말하는 ‘국토보유세’, 또는 ‘사회보장세’ 또는 ‘사회복지세’를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율이나 감면과 같은 미시적(?) 조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증세는 쉽지 않다. 우리도 잘 안다. 그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모든 현행 조세는 말 그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온갖 기술과 지혜를 동원했을 터이니 실무적으로 틈이 많을 리 없다.

여기서 증세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다. 기술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정치로 접근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증세에 찬성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증세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다음 정권에서 그 누가 대통령이 되든 ‘증세’를 피할 수 없다면 정치화도 비껴가기 어렵다. 정권이 아무리 반(反)복지-친기업적이어도 더는 담뱃세 인상과 같은 꼼수를 부릴 여건이 아니다. 돈이 필요한 약속을 많이 하는 대통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선 시기 아직 증세는 충분히 정치가 되지 못했으니, 많은 후보자들이 미적거리는 것이 안타깝다. 증세에 찬성하는 이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법인세 인상과 중산층 세금 부담에는 소극적이다(기사 바로가기). 그나마 작은 방안들도 뚜렷하지 않다.

사정이야 이해하고도 남는다. 돈을 더 낸다는데 누가 두 손을 들어 환영할까. 멀지 않은 과거, 아무 해당이 없는 사람들도 종합부동산세를 반대했을 정도로 조세는 저항을 부르기 쉽다. 이 자체로 증세는 이미 정치다. 정치 의제가 되지 못하게 억누르는 정치.

현실 정치도 지지부진이다. 정치가 본래 포퓰리즘적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면,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하는 것이 최선이긴 하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조세 행정을 개혁하며 예산의 지출 구조를 조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면, 이번에도 그래도 된다. 건강보험료를 올리지 않고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수가 있으면, 무엇 때문에 더 말하겠는가.

 

정치가 해야 할 구실은 또한 반걸음 더 나가는 것이다. 조세에 대한 즉자적인 불신과 저항이 복지와 재정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상투적으로 표현하자. 여론(현상)을 존중하되 모든 것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 현상을 넘어 의제를 내고 토론을 유발하며 ‘숙의’를 조직하는 데에서, 민주주의는 비로소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대통령 선거의 의미가 무엇인가? 대통령을 뽑는 것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논의하고 가닥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구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기운이 드높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중요성이 더하다.

지향을 두고 갈등하는 것은 증세를 둘러싸고도 충분히 그렇다. 욕망하는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갈등하며, 때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와 그 후보가 개입할 가장 중요한 정치의 영역이다.

 

증세가 정치인 한, 누구의 무엇을 몇 %, 증세 또는 감세의 기술을 내놓으려 노력하지 말라. 그보다는 각자의 국가 재정 비전을 내라. 그리하여 어떤 방법이 있는지, 어떤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지, 인식하고 성찰하게 거간꾼 노릇을 하라. 증세의 정치를 조직하고 밀고 가는 일, 그것이 대선과 대선 후보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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