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대선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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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일이 이번 주 화요일, 5월 9일이다. 유권자의 26%가 사전투표를 했다니, 선거일이라기보다는 그날 선거가 끝난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선거 결과를 미리 점칠 수는 없지만, 어떤 후보가 되더라도 비슷한 과제가 남는다. 시민의 관점에서 다음 대통령과 정부에 몇 가지를 부탁한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도 포함한다.

 

첫째, 이른바 ‘통합’에 대하여

 

선거 과정에서 거의 모든 후보가 ‘통합’을 주장했다. 다들 통합을 위해 가장 좋은 후보라고 자임했으나, 우리는 그 실체를 잘 모른다. 무엇을 통합한다는 것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일반 시민은 이해하기 어렵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여소야대인 의회권력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법 하나를 고치려 해도 큰 당 하나가 반대하면 잘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우리 사회가 집단으로 경험한, 그 악명 높은 언론권력의 지형은 또 어떤가?

지금 여러 후보가 말하는 통합이 그런 상황을 이기는 방도인가? 어떻게 하려고? 통합이 서로 다른 현실 정치세력이 권력과 자리, 자원(돈)을 나누는 것이면, 그것은 시민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들’만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국무총리를 누가 하고 장관 자리를 어떻게 나누는 것이 국민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 당의 지지가 약한 지역에 무엇을 지어주고 무엇을 옮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 시기 나쁜 짓을 했지만 통합 차원에서 그냥 덮는다? 겨우 이런 뜻이면, 또는 ‘나눠 먹기’나 ‘야합’ ‘이합집산’을 뜻한다면, 우리는 그런 통합을 반대한다.

통합은 ‘국론 통일’이거나 두루뭉술한 중도, 또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회색의 모호함이 될 수 없다. 아예 반대나 경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그런 종류의 ‘같음’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우리 모두 민주주의는 본래 시끄럽고 복잡하며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것을 안다. ‘숙의’에 기초하는 한, 다양성과 개별성이 민주주의의 토대다. 속임수와 비합리성, 폭력, 차별과 배제에 의존하는 것을 빼고는, 극단조차 다양성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

‘시끄러움’을 누가 왜 두려워하는가? 박정희 체제, 또는 총동원 체제의 유산은 아닌지 반문할 일다. 통합은 다양성과 시끄러움 속에서 만들어지는 ‘공공성’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불평등 심화를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공동의 이해 같은 것.

또 한 가지, 우리가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통합도 있다. 통합이라 하려면, 그것은 지금까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늘 주변부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비정규직,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과 난민, 장애인,…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배제되지 않는 것이 통합이다. 새 정부는 이런 의미에서 통합적 정부가 되어야 한다.

 

 

둘째, 공약은 이제 시작이다.

 

예상한 대로 선거 과정을 통해 상당수 공약은 비슷해졌다. 공약에 담긴 가치 지향이 명확하지 않고 정당과 대통령 후보의 그것도 비슷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 공약의 ‘수렴’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공약의 ‘동질화’에는 장단점이 다 있다. 여러 후보가 같은 약속을 하면 (유권자의 요구가 강하다는 의미에서) 누가 집권하더라도 공약을 추진할 명분을 얻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번 대선에서 다들 동의한 아동수당이나 장기요양 확대가 그런 공약에 속한다.

단점도 있다. 공약이 비슷하면 후보 선택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당사자, 행정부, 유권자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온갖 약속을 다 하는 선거에서 무슨 말인들 못 하랴”로 받아들이면 공약은 ‘공약(空約)’으로 전락한다.

장점과 단점이 드러나는 것은 이제부터다. 공약이 어떤 운명이 될 것인가를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하지는 못할 터, 그래도 가장 중요한 요인 한 가지는 정부와 공약을 둘러싼 새로운 ‘권력관계’이다.

대통령과 정치인, 정당은 선거 때와 달리 반드시 실용적이다.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거나 기존 정책을 바꾸는 데에는 큰 비용이 들지 않는가. 돈이 들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을 물어야하면, 누구나 현실주의자가 된다. 정치적 이익을 면밀하게 계산하고 이에 따라 공약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할 것이다.

언론 역시 실용성을 강조할 터. 선거라는 특수한 시기에 한 약속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훈계가 등장할 것이 뻔하다. “고착화된 저성장,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외교안보 상황, 탄핵과 선거 국면에서 분열된 민심,…” 장담하건대, 이런 기사가 꼬리를 물 것이다. 이어서 공약을 ‘조정’하라는 주문.

실제로는 공약을 버리라는 뜻이다. 자원을 새로 배분해야 할수록 공약에 대한 저항은 심할 것이니, 재원 계획이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은 모든 약속이 여기에 속한다. 아동수당이든 기초연금이든 증세 논쟁으로 비화하는 것은 순식간, 기업의 국제 경쟁력, 가계소득, 한국경제의 성장 잠재력이라는 익숙한 (그리고 이념을 암묵적으로 내포한) 논쟁으로 발전할 것이다.

공약은 반드시 그리고 곧 ‘권력 투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경제나 성장은 빼고). 복지를 확대하거나 불평등을 줄이자는 공약들이 더 그럴 것이다. 저항은 강하고 옹호는 흩어져 있는 것이 현재의 권력관계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 정권에서도 정치와 정책이 이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한, 공약은 좌초하거나 형식만 남기 쉽다. 의미 있는 공약이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사회권력’을 강화해야 한다. 감시와 비판, 요구, 지지, 어떤 형태든, 정치와 정당, 행정부를 압박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과제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셋째, 다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자.

 

벌써 그런 말을 하나 싶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을 준비하는 것은 단지 이번에 아쉬웠던 점을 잊지 말자는 뜻을 넘는다. 오래 걸리고 기초를 다져야 하는 일이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이번 선거도 개인과 ‘개인기’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선거는 처음부터, 다양한 사회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가치’ 경쟁이 아니었다. 노동, 농민, 청년, 여성, 소수자를 대표하는 정치는 없거나 터무니없이 약했다. 지속가능성과 성장, 불평등과 차별, 평화 등의 지향을 논쟁할 기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 시스템 또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대의 민주주의를 전제하면, 정치적 대표성은 현재로는 정당을 통하는 방법이 유일하다. 정당 정치가 작동한다면, 어떤 개인인가가 아니라 어떤 정당 후보인가를 보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당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할 형편이 아니다. 지향은 둘째 치고, 조직과 구성원, 활동이 차마 정당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다. 오죽하면 대통령 후보를 당원이 아닌 ‘국민경선제’로 뽑아야 할까. 공약을 형성하고 유권자에게 내놓는 것은 아직도 정당이 아니라 후보의 캠프다.

다음이 조금이라도 더 나으려면, ‘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멀고도 험한, 달성하기 어려운 탁상공론일지 모르지만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 지역, 직장, 학교를 가릴 것 없이, 지금부터 더 많고 깊은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 정당과 시민사회(사회권력)가 튼튼해져야 대통령 선거가 그리고 대통령이 나아진다.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데에 새 정부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 아니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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