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유명한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만은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가 흔히 세 가지 명제를 활용한다고 주장했다(이근영 옮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①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 역효과 명제
②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 무용 명제
③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 위험 명제
허시만은 200년 이상의 서양 역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논증했지만, 한국에서도 이 명제들이 작동한 예는 많다. 세금을 올리면 기업 활동(자유!)이 위축되고, 결국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일부 주장은 전형적인 ‘위험 명제’다.
지금 시기, 허시만의 성찰을 참조하는 것은 유용하다. 아울러 ‘보수의 지배’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이 명제들은 책상머리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공허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번역은 본래 제목과 사뭇 느낌이 다르다. 보수는 ‘반동(reaction)’을, 그리고 지배는 ‘수사학(레토릭, rhetoric)’을 옮긴 말이니. ‘반동의 수사학(레토릭)’ 정도가 저자의 의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레토릭’이 무엇인가? 굳이 서양의 수사학 전통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실’ 없는 레토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든 글이든, 또는 이성이나 감성, 인성 그 무엇을 동원하든, 레토릭은 현실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반동의 레토릭’ 또는 ‘반동을 위한 레토릭’은 현실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더라도 지배할 정도로 힘을 갖지 못한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현실과 레토릭이 충돌하는 중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그렇고 최저임금이 그렇다. 공무원 증원을 둘러싼 논란, 증세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국정원과 검찰을 포함한 권력기관 개혁도 예외가 아니다.
저임금 노동자의 삶을 개선한다고 최저 임금을 인상하면, 중소기업과 자영자가 고용을 기피하여 일자리가 줄고 생활은 더 나빠진다(역효과 명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정도를 넘어 (이른바) 과학과 지식을 동원하여 역효과를 주장한다.
외교안보와 국방은 ‘무용 명제’가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표적 영역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그래 봐야 한미동맹을 깰 수도 없으면서. 결국 사드도 그대로 아닌가. 남북관계도 근본적으로는 바꾸기 어려운 것 아닌가?
‘위험 명제’는 더 익숙하다. 재벌 개혁, 복지 확대, 특목고 자사고 폐지, 증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건강과 안전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이 직·간접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호출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대부분 문제가 이 명제에 해당한다.
비록 레토릭이라 하더라도, 그 힘은 현실에서 나온다. 레토릭은 현실을 반영하고, 힘을 가진 레토릭은 다시 새로운 현실이 되는 ‘나선 상승’. 반동의 레토릭이 현실을 잘 설명할 때, 레토릭은 그냥 레토릭이 아니라 권력을 얻는다.
무엇이 반동의 레토릭에 생명을 불어넣는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는 조급한 성과주의와 그 실패, 그리고 이를 둘러싼 미시 정치에 주목하고자 한다. 반동은 현실의 작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개혁은 늘 급하고 권력 기반이 약할수록 빨리 증명해야 하는 법. 현실의 틀 안에서, 그러나 파격적이어야 하는 것이 딜레마다. 근본 체제를 건드리는 것은 미루어야 하지만 ‘초월적’이어야 한다.
소수 권력의 개혁에서 스타일과 외형에 치중하는 것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의 정치와 정책은 실제 성과보다는 노력이나 ‘투입’에 더 관심이 많다. 결과와 성과는 어떻게 되든, 무엇을 만들었고 바꾸었고 돈을 썼다는 데에 집중한다. 노인 빈곤 감소보다는 기초연금 인상액에, 금연 효과보다는 담뱃세나 담뱃갑 포장에, 가계 파탄을 예방한 정도보다는 본인부담 상한선이 얼마인가가 더 중요하다.
새 정부의 핵심 공약 중 하나, 치매국가책임제는 이런 개혁과 반동의 구조, 그리고 그 명제에 둘러싸여 있다. 이 공약이 특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에서 보편 구조와 원리를 유추하는 것일 뿐, 어느 분야 어떤 개혁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짐작한다.
지난 주말 국회를 통과한 추가경정예산안에는 ‘치매안심센터’ 205개소 신규 설치에 필요한 예산 1,230억 원이 포함되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치매국가관리제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공식 결정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이 예산이 편성되고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주로 치매안심센터에 인력을 채용하고 시설을 바꾸는 예산이라고 한다. “당초 치매안심센터 기본 계획을 보면, 각 센터별로 인력은 25명, 설치 비용은 7억 5,000만원이 배정됐다. 시설 규모는 사무실, 상당·교육실, 검진실 및 프로그램실 등 500m²로 설정됐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제대로 시작한 개혁인가? 인력을 모두 정규직으로 한다는데 시군구별로 25명의 인력을 어디고 어떻게 구하는지, 500m²의 공간은 있는지 새로 구해야 하는지, 효과성이 증명된 프로그램은 충분한지, 잘 모르겠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 파격적으로, 결과와 효과보다는 투입 위주로, 다소의 부작용은 감수하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마땅히 그럴 것이고 그래야 한다. 드러난 것은 일부, 당장 할 수 있고 성과가 나타날 일과 방법에 집중했으리라. 새 정부 출범 ‘100일 이내’ 또는 ‘올해 안’이라는 시한에 할 수 있는 것, 전체의 한 부분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독립적으로, 그러나 전체에 연계해서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접근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전체’ 개혁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추경예산이 통과되었으니, 이제 보건복지부는 시군구를 지도·감독하면서 치매안심센터를 확대하거나 신설하라고 할 것이다. 정확하게는, 다그치고 압박할 것이다.
장담하건대, 현실은 녹록치 않을 것이고 심하면 ‘아수라장’이 될지도 모른다. 공간이 없는 곳, 예산이 모자라는 지자체, 사람을 뽑을 수 없는 시군구, 있던 직원을 정규직으로 해야 하는 곳 등등, 문제와 장애는 백 가지 천 가지다.
정말 효과 있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많은 주민이 이용할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문이다. 상담, 검사, 인지 재활 프로그램, 단기 쉼터, 카페 등이 환자와 보호자가 요구하는 서비스의 우선순위에 맞는지, 이것이 ‘국가책임관리제’의 취지에 부합하는지 모르겠다. 정부는 다시 이것이 전체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역시 인정한다. 그렇다면 “전체 구상과 계획, 방법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우리의 관심은 치매안심센터가 안착할까 하는 정도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우선순위가 올라간 ‘돌봄의 사회화’가 실패할까 걱정스럽다. 이 실패는 ‘역효과’와 ‘무용’과 ‘위험’을 핑계로 반동과 그 레토릭에 힘이 될 수도 있다. 잘 되지 않고(정부의 비대화와 공무원 증원), 근본적인 해결도 아니며(지속적 돌봄 부담), 결국 복지 부담만 늘리는(세금이나 보험료 인상) 꼴이라는 레토릭. 어떤 면이든 치매안심센터가 ‘실패’하면 그런 레토릭의 온상이 된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모든 미시 정책과 프로그램도 예외 없이 반동과 그 레토릭을 극복해야 한다. 역효과가 없거나 적고,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유용한 방식이며, 정치 공동체가 번영하는 필수적 과제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증명하는 것.
돌봄의 사회화를 향한 개혁을 지지하기 때문에 정부에 제안하고 요구한다(<서리풀 논평> 2017년 6월 5일, 서리플 논평 바로 가기). 먼저, 조급한 성과주의를 버리라. 정부는 성과(또는 공약 이행)로 연말까지 몇 군데 센터를 열고 몇 명을 채용했으며 얼마의 시설을 확보했다, 그래서 연인원 몇 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결과를 내놓을 공산이 크다.
단기성과를 개혁의 동력이나 마중물이라고 강변하지 말라. 돌봄 부담, 건강과 삶의 질, 형평성 같은 것이 진짜 성과라면, 사람들은 곧 저절로 깨닫고 알게 된다. 그런 성과가 나타나서 좋아진 현실이 더 중요하다. 현실이 나아지지 않으면 개혁의 동력도 없다!
지금은 ‘장기’, ‘종합’ 계획과 촘촘한 디자인이 더 급하다. 지역사회와 시설, 의료와 복지, 가족 돌봄과 사회적 돌봄, 예방-치료-재활을 촘촘하게 잊는 연결망. 어떻게 만들고 연결할지, 역할을 어떻게 나누고 합할지, 틀과 내용, 흐름을 정교하게 구성(재구성)해야 한다.
누가 할 것인지도 소홀할 수 없다. 개혁의 진짜 동력은 시민들의 이해와 정치적 지지가 아닌가? 지금 우리의 정치 수준은 ‘장기’를 바랄 수 없다거나, 그래서 ‘치매국가관리제’의 성과가 나는데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의지만 분명하면,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은 장기 구상과 종합 계획을 보고 논의하는 것에서도 충족될 수 있다.
이해와 동의, 그리고 통로로서의 참여야말로 정치의 본령임을 강조한다. 허시만의 처방도 다르지 않다. 반동과 그 레토릭에 대응하는 방법은, 그리하여 개혁을 밀고 가는 동력은 “민주주의 친화적(democracy friendly)인 논의”에서 나온다(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