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보건의료정책에 더 많은 민주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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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미국 오레곤 주는 메디케이드(저소득층을 위한 의료지원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의료급여와 비슷하다)가 재정위기에 빠지자 장기이식을 급여 항목에서 제외했다. 이 조치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일곱 살 먹은 백혈병 환자가 한국 돈으로 1억 원이 넘는 수술비용을 마련하려고 모금운동을 하는 중 사망하자 논란은 더욱 커졌다.

주정부가 쓸 수 있는 재정은 한도가 있는데 어떤 병을 가진 사람이 우선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비싸지만 극소수의 환자는 확실하게 낫게 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인가, 싸고 흔하지만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서비스가 우선인가.

이런 논란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예컨대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올리자는 데는 이론이 없지만, 노인 틀니가 먼저인지 새로 나온 초고가의 항암제가 우선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오레곤 주는 이런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길을 택했다. 주 의회의 상원의장이던 존 키츠해버(Kitzhaber)는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한다. 미리 기준을 정해놓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순서대로 진료항목을 명시적으로 정해놓자는 것이었다 (입법화).

당시까지 이런 방법은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 때문에 여러 찬반 의견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현재까지도 의의와 한계를 두고 연구와 평가가 계속되고 있다. 보건정책 분야에서는 이른바 “오레곤 실험(Oregon Experiment)”이라 불린다.

오레곤 실험이 법으로 만들어지고 실제 적용되는 길은 매우 멀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정책이 만들어지는 기술적이고 실무적인 과정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이 과정에서 보통의 시민들이 가진 시각과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중들은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정책결정에 참여했다. 정책을 수립하는 책임을 맡았던 위원회는 모두 11차례의 공청회를 열었고, 의료인과 시민단체 대표를 비롯하여 정책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의견을 폭넓게 들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방식인 지역사회 토론회도 47번이나 열렸다. 주민들이 어떤 시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지 알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일부 주민만 참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자 한계였다. 주최 측은 일반 사람들이 많이 참여할 것을 기대했으나 참석자의 약 70%는 의료 관계자였다. 가난한 사람은 거의 없고 여유 있는 계층이 많았던 것도 문제였다. 토론회에서는 정책을 주민에게 소개하고 소집단별로 토론한 다음 토론결과를 발표하게 했다.

세 번째 참여방식은 주민 여론조사이다. 전체 주민을 무작위로 뽑아 29가지 건강상태를 두고 무엇이 중요한지 주민의 판단을 물었다.


<월드뱅크에 소개된 브라질 ‘민중건강평의회’>

전체 방식은 매우 복잡하지만, 주민이 낸 의견만 가지고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문가의 판단과 객관적인 데이터도 중요한 기준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낸 의견의 비중은 처음보다 더욱 줄었는데, 일차 결과를 두고 거센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치통, 두통, 요통 같은 가벼운 병이 간 이식이나 골수이식보다 더 우선순위가 높게 나온 것이 비판을 받은 핵심 이유였다. 결국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여 주민들의 의견을 희석시키는 방향으로 초안을 고쳤다.

오레곤 실험 이후, 일반 시민이 보건정책 결정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익숙한 주장이 되었다. 물론, 오레곤 사례에서 보듯이 보건정책을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문성과 효율성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고,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다. 결과(건강이나 의료혜택)가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결과주의” 역시 우리 속의 방해물이다.

그러나 정책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좋은 삶을 위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하물며, 심화된 민주주의를 통해 더 좋은 정책이라는 결과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한국의 정책에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며, 보건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비교적 최근에 정부와 의료계가 갈등을 빚고 있는 두 가지 정책이 있다. 하나는 올해 4월부터 시행된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이고, 다른 하나는 7월부터 시행하려고 하는 일부 질환의 포괄수가제이다. 정부는 정책이 필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의료계는 정책이 가져올 부작용이나 부정적 결과를 근거삼아 반대한다. 갈등의 양상이 사뭇 격렬해서 의료대란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전에도 그랬지만, 찬성이든 반대든 늘 등장하는 명분이 국민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국민은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다. 역설이자 부조리지만, 이 역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창한 이름을 가진 여러 위원회나 공청회에 소비자, 시민 대표가 참여하고 발언하지만, 아무래도 요식행위 또는 합리화 과정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나마 이번 정부 들어서는 그조차 귀찮은 듯 대폭 생략하거나 줄이는 일이 흔하다. 보건의료정책은 전문성이 강하다는 것을 핑계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만성질환관리제나 포괄수가제가 시행되면 일차적으로 영향을 받는 집단은 일반 대중이다. 정부와 의료계가 심각하게 다투는 것을 보더라도, 재정이든 의료이용이든 그 영향이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당사자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찾기 어렵다. 그 결과, 당사자의 이해충돌과, 그 이해를 조정하고 무마하려는 정책만 두드러져 보인다.

이제 보건의료정책에도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형식적인 공청회나 전문가가 대신 참여하는 위원회, 민주주의를 흉내 내는 요식행위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많은 대중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적 공공성”에 기초한 정책결정과 집행이 필요하다.

※ 참고 자료
– Caitlin J. Halligan. “Just What The Doctor Ordered”: Oregon’s Medicaid Rationing Process and Public Participation In Risk Regulation. Georgetown Law Journal, 83, 199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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