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식민의 추억, 제국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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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가 광복절이다. 무슨 날인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는가는 다양하다. 
 
우연이지 모르지만 마침 들끓는 독도 문제도 그 중 하나다. 내내 그랬지만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대통령이 갑자기 독도를 방문한 사건에다, 올림픽에 나간 축구선수가 독도가 적힌 종이를 들었다가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정부와 민간 할 것 없이 온 힘을 다하는 기세라고나 할까. 
 
모두 한국인이 가진 과거 경험이나 추억과 무관하지 않다. 그전에는 어떠했든,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해방 후 한일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 스포츠에서 경쟁의식이 더욱 유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을 유달리 민감하게 대하는 차원을 넘는다. 올해 광복절이 67주년이니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두 세대도 더 지난 일이 되었다. 
 
꼭 일본과의 관계가 아니라도 ‘식민’의 문제는 제대로 극복되지 못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식민 시대를 극복하는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제라는 뜻이다. 
 
이 과제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국민국가’라는 좁은 틀(어쩌면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일지도 모르는)에 지나치게 ‘붙들려’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식민지 경험이 유일한 이유로 작용한 것은 아니겠지만, 국민국가의 문제는 이와 무관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을 매개로 한 국민국가의 정체성은 다른 사회적 정체성을 압도한다. 계급이나 지역, 종교, 인종 등은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정체성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사회에서 국민국가의 정체성은 전형적으로 타자와 구별 짓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식민지와 전쟁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자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구별과 적대야말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핵심 요소이다.           
 
물론 국민국가의 자기 정체성은 사회적 통합성을 높이고 집단의 힘을 모으는 데 필수적인 요건으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국민국가의 통합적 정체성이 기여했다는 주장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민족주의는 인종주의’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민족에 기초한 국민국가의 ‘열정’은 때로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적극 긍정하는 사람들조차 이성적, 합리적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    
 
독도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요란한’ 방식이 실제 도움이 되는가를 두고 말이 많지만, 지금까지 어느 정부 할 것 없이 국민들의 ‘감정’을 모른 척 하기 어려웠다.   
 
열정과 감정은 거칠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성과 합리성을 말한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최근 몇 년간 FTA를 추진하면서 정부가 내세운 논리는 냉정하게 생각해야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주장도 진정한 국익을 내세우는 논리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이성과 합리성은 허울뿐 눈 먼 열정과 꼭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종류만 다를 뿐 결국 애국과 국익에 복무하자는 것은 같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강고한 국민국가 속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국민국가,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한 그 이념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국경을 넘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인류 공통의 가치와 긴장관계를 만드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건강과 보건의료도 이런 맥락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분야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국민국가의 틀과 경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몇 가지 익숙한 것만 들여다보자. 
 
우선 보건의료정책이 확대되고 변화함에 따라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밖으로 넓어졌다. 이는 검역이나 전염병 관리, 여행자 건강처럼 국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늘어난 것 이상을 뜻한다. 한 마디로, 국민국가 사이의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국제적인 정치경제의 장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의료관광이다. 약품이나 장비를 수출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비슷한 점이 있다. 물론 의료관광이 더 직접적이지만, 약품이나 장비도 다른 나라(국민국가)의 건강과 보건의료에 영향을 미친다(한국의 다국적 제약회사를 보라).  
 
의료관광이나 보건의료산업을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든, 국민국가를 넘어 활동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다. 물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상대국도 이 때문에 혜택을 본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국가 사이의 분업은 항상 ‘윈-윈’ 게임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해결할 수 없는 긴장이 생기는 이유이다. 혁신적인 신약을 두고 벌이는 다국적 제약사와 후진국의 싸움은 이를 잘 나타낸다.  
 
그나마 의료관광의 규모와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아서 아직 본격적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따라 상대방 국가의 보건의료체계를 흔들거나 사회 구성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더구나 경쟁적으로 ‘개척’하려는 것(나아가 의료 한류를 내세우는 것)은 협력보다는 (비록 시장이라고 하지만) ‘영토 확장’의 기운이 짙다. 보건의료기관이 외국에 진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대 국가의 필요에 따라 부족한 것을 돕고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면 쉽게 갈등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사단법인 한국의료관광협회의 누리집 첫화면>.
 
국민국가의 동기가 자기 이익의 실현에 있는 한, 이 긴장관계를 제대로 해소할 길을 찾기는 어렵다. 본래 현실의 국제관계가 약육강식이고 경쟁적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의 과거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예도 있다.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자, 다른 외국인 거주자의 건강과 보건의료 문제이다. 지리적으로는 국내 문제지만, 이들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면 차별과 배제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사실 국민국가의 전통적인 틀로는 이들을 우리 사회의 온전한 ‘시민’으로 제대로 포함하기 어렵다. 흔히 ‘국민’으로 통합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그 마저 시혜나 온정 차원에 머무르기 쉽다.    
       
국민국가의 정체성이 또 다른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영역은 국제원조라 할 수 있다. 새삼 설명할 것도 없이 이는 원조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최근 들어 한국의 국제원조 규모가 급증하고 있고 보건의료 원조도 따라서 증가하고 있다. 국가 사이의 공식원조 이외에도 개인이나 민간단체가 참여하는 원조나 봉사도 날로 늘어난다. 
 
자기중심적인 국민국가의 이념에 기초할 경우 원조나 봉사의 목적은 매우 좁아진다.  전형적인 ‘국익론’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형 원조를 ‘수출’한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이처럼 자기 이해에 기초를 둔 지향은 당연히 갈등을 일으킬 씨앗을 내포한다. 상대국의 상황과 필요, 지향이 중심에 놓이지 않는다면 원조와 봉사는 새로운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기 쉽다.
 
역사적으로 한국 사회는 국민국가의 좁은 이해를 넘기 어려운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자기 이익에 충실하고, 자기중심적 경향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보건의료와 건강과 관련된 정책과 활동도 마찬가지다.   
 
국익과 애국애족을 넘어선 국민국가의 정체성은 협력과 공존, 연대의 가치를 핵심 요소로 포함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과 억압을 넘어서기 위해 같이 노력한다는 것이 국민국가의 행동에 중심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료관광을 비롯한 보건의료산업, 외국인과 이주자, 보건의료 국제원조와 협력이 탈(脫) 국민국가적 원리를 바탕으로 다시 편성되어야 한다. 식민의 경험을 가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또 다른 제국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다. 협력과 연대를 통해 같이 발전한다는 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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