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논평 ] 다시, 평화체제 만들기에 참여하기
지금 모든 사람이 관심을 쏟고 모든 언론이 다루는 일, 남북 정상회담은 이야기로 또 역사로 한참을 더 이어가리라. 사건과 말이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홍수처럼 쏟아지는 중이다. 이 <논평>처럼 ‘연성(소프트)’의 형식과 내용은 눈길을 붙잡기 어렵지만, 우리라고 이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1.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무력 충돌의 기운이 줄어드는 것을 환영한다. 국내외 어떤 집단, 어떤 세력의 이념과 이해관계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보다 중요하지 않다. 어느 특정 정치세력의 성공과 실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전쟁은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고, 평화는 대량 살상을 막은 가장 중요한 예방주사다.
평화는 힘없고 약한 사람에게 더 중요하다. ‘전쟁 불사’를 외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누구에게 평화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전쟁에서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누구이며, 속수무책으로 직장과 가정, 공동체가 깨질 사람이 누구인가? 그 비용은 결국 누가 내는가? 전쟁과 평화는 또한 불평등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2.
어느 때보다 실용적이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북한의 태도를 위장평화라 비난하지만,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진심’과 ‘위장’을 어떻게 나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도덕률은 국민국가의 이른바 국익이 최대치가 아니던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남한의 진심과 위장이 같은 원리 위에 움직인다면, 평화는 실용의 토대 위에 구축될 수밖에 없다.
실용은 본질에 충실하다. 평화를 ‘구걸’하는 것,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 또는 (그런 방법이 있다면) ‘소프트파워’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왜 나쁜가?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미국과 미국 대통령이 결정적 성과를 차지하고 싶어 하면, 남북한 회담은 구체적 성과가 없느니 확실한 보증이 없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성공을 양보하는 것이 실용이다.
상대가 북한이든 미국이든 또는 중국이든, 진심으로 평화를 원하면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실용의 요체다. 설교나 협박, 광화문의 시위로 상대를 바꿀 수 없다면, 하는 수 없이 ‘주고받기’가 필요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내놓을 것인가?
3.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제 질서, 그리고 그 영향력은 가공스럽다. 남북한이 그 힘을 의식하며 또한 활용하려 하는 노력이 한편 답답하고 또한 아슬아슬하다. 남북한이 더 큰 장기판의 졸(卒) 노릇을 한다는 어떤 사회주의자의 주장처럼(기사 바로가기), 미국이 ‘노(No)’라고 말하는 순간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래도 비관하거나 냉소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완강하고 냉혹한 국제 정치의 구조가 중요하지만 구조가 미치지 못하는 틈과 ‘둔함’도 있는 법, 이를 활용하면 구조까지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재선을 위해 큰 성과를 내고 싶은 트럼프의 이해관계가 그런 틈에 속하지 않을까?
우리의 정치와 민심, 운동도 백 퍼센트 종속변수일 수 없다. 무엇을 바라고 옹호하며 실천하는지에 따라 내부적으로는 현실 정치를 외부적으로는 국제 규범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한반도 안에서라도 ‘평화 만들기’가 압도적인 정치 담론이 되면 누구도 대놓고 무시할 수 없다.
4.
큰 흐름에 조응하면서도 너무 멀지 않은 실천을 넓혀가자고 다시 제안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당장 통일로 질주하는, 실용성이 없는 성급함이다. 무력 충돌을 피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말과 실천이 쌓여야 통일도 상상하고 말할 수 있으니,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가 절실하다.
구경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리라. 어떤 실천인지에 대해서는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서리풀 논평>의 주장을 꼭 그대로 다시 불러온다(서리풀 논평 바로가기, 프레시안 바로가기, 라포르시안 바로가기).
“무엇보다 먼저, 극장 밖으로 나오자고 제안하고 싶다. 텔레비전과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과제로. 예를 들어, 관련 기관과 관련자는 당장 인도주의적 남북 교류 논의를 다시 시작하자. 개성공단 문제, 이산가족 만남, 스포츠와 문화 교류, 관광도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보건과 의료는 극장을 나와 현실로 들어가는 영역으로 적격이다. 많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어린이 영양, 예방접종, 의약품 등이 저절로 떠오른다. 전문가의 학술 교류도 괜찮다. 과거 경험이 있으니 실무적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어떤 방식의 통일이 바람직한지, 한미동맹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중국과 일본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 ‘먼’ 이야기에서 출발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관객이 될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첫 번째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튼튼하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 내부의 압력을 키우는 것도 한 가지 길이 아닌가 한다.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열정을 발견하고 만들며 키우는 일, 그 힘이 종국에는 무대 저편, 미디어 건너편에 가 닿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벼락같이 주어진’ 선물이 아님을 잘 안다. 이제 조금 열린 그 틈새가 오랜 기간 극장 안과 밖에서 말과 경험, 압력을 쌓아 온 결과라면, 그 문을 더 활짝 열어젖힐 방도도 따로 있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