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년동안 연구소에서 독립연구를 진행한 류한소 영펠로우의 이슈페이퍼입니다.
정신질환이 산업재해로 ‘승인’받는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탐색해본 예비연구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심층적 연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독자들의 비판과 조언 부탁드립니다.
지하철 기관사들의 공황 장애, 쌍용차 구조조정 이후 노동자들의 자살, 지속적인 입주민의 폭언 이후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른 압구정 경비노동자, 최근의 간호사들의 태움까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떠오르는 것은 영혼을 갉아먹는 일터에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앞서 말한 사건들이 너무 무겁다면, 회사에만 가면 우울해진다는 ‘회사 우울증’이나 최근에 불고 있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일과 개인의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신조어)’ 열풍은 어떤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터에서 겪는 스트레스나 불안감, 우울과 소진은 우리의 일상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이렇듯 일터에서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위험(psychosocial hazard)은 노동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왔을 것처럼 일터에 존재하는 오래된 위험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위험이기도 하다.
일터에서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위험을 새로운 위험으로 보는 시각은 노동의 성격이 변했다는 데 주목한다. 노동의 변화는 새로운 위험을 동반하며, 그와 동시에 안전보건관리의 기본 골격을 구성하는 논리들 또한 변화시킨다 (Thomas, 2016). 대체적으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직면하는 건강 위험이 육체적이거나 독성 물질에 대한 노출이었다면, 20세기 중반부터는 일이 조직되는 방식으로 관심이 이행했다. 일이 조직되는 방식에 따라, 스트레스가 많고 의미 없고 모욕적인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작업장에서 건강의 주요 위해요인이 되었다. 또한 물리적 작업 요구는 감소했지만, 멀티태스킹이나 고객, 직장 동료와의 상호 작용 같은 다른 종류의 작업 요구들의 강도가 증가했다. 이렇듯 노동 환경의 사회적이고 조직적인 면에 대한 주목은 작업장의 급격한 변화의 산물이다 (Berkman, L. Kawachi, I. and Theorell, T. 2014).
이렇듯 일이 가진 사회심리적 특징에 대한 강조는 변화된 일의 성격, 노동 환경, 이에 수반하는 작업방식의 변화, 새로운 고용형태, 기술변화 등 변화된 노동의 제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19세기식의 육체적․독성 노출’로 인해 아프거나 다치는, ‘21세기의 비가시화된 노동자들’의 존재다. 이때 ‘비가시화’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첨단산업’인 휴대전화를 개발하고 디자인하고 마케팅하는 노동은 가시화되어 있지만 그 휴대전화를 만드느라 메탄올에 노출되어 시력을 잃게 되는 노동은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일터에서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위험에 대한 강조는 물리적 위험 요인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안전보건의 범위를 경영방식이나 작업 조직 등 노동 환경으로 확대시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직업병의 역사는 노동환경과 산업의 변화를 추적하는 거울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의 주요 직업병의 발생, 이와 관련한 투쟁 사례들에 대한 역사적 개괄을 하는 기존 자료들은 직업병의 범위가 70년대 진폐증, 80년대 진폐와 소음성 난청에서 90년대 중금속․유기용제 중독으로의 확대, 2000년 이후 근골격계 질환과 뇌심혈관계 질환으로의 관심 이동, 2010년 이후 직업성 암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윤근, 2012). 산재 요양 승인자에서 진폐증과 소음성난청이 차지하는 분율은 1994년까지는 90% 정도로, 사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1995년 직업병 인정기준에 뇌심혈관계질환에 대한 기준이 제정되고, 이후 뇌심혈관계질환 요양 청구가 증가하면서 두 질환의 분율은 1995년에 61%로 감소하였다. 2000년대에는 근골격계질환 인정이 증가하면서 그 비율은 한층 감소하여 20% 아래로 떨어졌다. 그 이후에는 뇌심혈관계질환, 근골격계질환 등 작업관련성 질환과 진폐증, 소음성 난청을 제외하면 ‘전통적’ 직업병 보다는 다양한 업종에서 다양한 질병이 직업병으로 등장하고 있다(강성규, 2008). 전체적으로 보면 사고성 재해나 사망 사고 위주의 산업재해로부터 직업병이나 근골격계,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인정기준이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다치거나 사망하는’ 노동자 위주에서 ‘아픈’ 노동자들로 보호의 영역이 확대된 셈이다. 정신 건강 영역은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추가된 영역이자 이후 확대될 영역으로 볼 수 있다.
일터에서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위험은 새로운 위험인 동시에 오래된 위험이기도 하다. 기존에 없던 위험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존에도 늘 존재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받은 노동자에게 이를 보상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야 하는 ‘정당한’ 위험으로, 즉 산업재해로 인식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일상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행해졌던 직장 성희롱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산업재해가 “업무상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 질병, 신체장애 또는 사망”을 의미한다면, 직장 내 성희롱은 “업무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정신적, 신체적 부상을 당하는 것”이니 산업재해로 인식하고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실제 적용은 최근에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최윤정, 2004).
국제노동기구(ILO)는 ‘사회심리적 위험(psychosocial hazard)’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조직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중반 세계보건기구(WHO)와 함께 작성한 보고서(ILO & WHO, 1986)에서, ILO는 직무를 설계, 조직, 관리하는 방식과 작업조직이 운영되는 방식이 해당 노동자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ILO는 직무, 작업조직의 설계와 관리 상 결함이 노동자의 건강에 잠정적 위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결함을 사회심리적 위험이라고 불렀고 또한 그러한 위험의 바탕이 되는 기전이 직무 스트레스 경험과 관련 있다고 밝혔다 (Thomas, 2016).
이렇듯 직무, 작업조직의 설계와 관리에 내재한 건강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의 건강․안전에 미치는 사회심리적 위험에 대한 관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안전보건 전문 분야가 성장했다 (Thomas, 2016). 더불어 직장에서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위험으로 인한 피해를 토로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신청하는 노동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정부와 노사 이해당사자들,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지식을 생산하는 전문가들을 포함한 다양한 주체들에게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국내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위험이 산업재해로 인식되고 판정되는 과정에서의 쟁점을 살펴본 예비 연구에 해당한다. 이러한 논의를 기반으로 추후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