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논평] 저출산을 걱정하는가? 여성의 권리부터.
이 정부 들어 처음으로(!) 저출산 대책이 나왔으나(기사 바로가기), 냉소적 반응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번 정권에서는 처음 내놓는 정책이라고 하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 익숙하다. ‘패러다임’을 바꾸자고 했으나 그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반응을 예상한 듯 하반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고 하나,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올까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변화를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하는 말이다. 구조를 말하면서 여섯 달 안에 새로운 제안을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정부는 진작 ‘구조 개혁’ 이야기를 꺼냈지만, 저출산과 관련된 구조를 무엇으로 보는지 의심스럽다. 새로 말하는 주택, 보육, 경력 단절, 일 생활 균형 등이 과거보다는 구조에 좀 더 가깝지만, 이들은 중간 구조에 지나지 않을 뿐 근본 구조가 되기는 멀었다. 그 갖가지 중간 구조들은 서로 나눠진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고 상관되어 삶의 총체성에 이른다. 우리가 이해하는 그 구조는 우리 사회 삶을 규정하는 조건과 환경, 그 근본 틀을 말한다.
저출산은 이 모든 구조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을 모두가 알지 않는가. 직업과 직장, 소득, 주거, 보육, 의료, 자녀 교육 등은 따로 뗄 수 없을 만큼 모두 맞물려 있다. 최소한의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선택하면 행복하게 애를 낳고/낳거나 키울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그 자녀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그 구조, 이를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이런 사회는 삶의 질이 보장된 사회, 행복하고 살 만한 삶과 다른 말이 아니다. 저출산 대책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실천을 종합해야 하니, 사실 다른 정책과 따로 떨어져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그 구조 또한 당연히 분리되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정책 결과는 구조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데도 이 정부 또한 단기적 성과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적 정치가 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구조를 어떻게 5년, 10년 안에 바꿀 수 있나? 뻔히 알면서 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려 하는지 답답하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구조는 특별히 더 말해야 하겠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에서 열린 두 집회는 한국의 저출산 정책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여러 언론이 동시에, 그리고 개인 매체까지 관심을 보였으니 다들 아는 소식이리라. 하나는 ‘불법촬영 편파 수사 3차 규탄 시위’, 다른 하나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의 낙태죄 위헌·폐지를 위한 시위다(기사 바로가기).
이번 불법촬영 규탄 집회에 (세 번 만에) 최대 인원이 모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부 언론은 침소봉대와 선정성을 마케팅 전략으로 택한 듯 보이지만, 해프닝과 에피소드가 아니라 본질을 봐야 한다. 시위는 발언이다. 여성의 삶이 일상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현실과 그에 대한 두려움(폭력적이다)을 몸으로 증언하는 것.
폭력과 불평등이 실재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상의 폭력, 그리고 이를 조장, 방조하는 불평등한 구조를 그냥 두고 공동체와 국가(!), 미래와 지속을 말하면 그게 당사자에게 먹히겠는가? 내가 이 공동체, 사회, 국가에 동질감을 느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미래라야, 비로소 정체성이 된다.
노파심에서 보탠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줄고 성 평등이 보장되어야 출산이 늘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더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것조차 이차적 결과다. 성 평등은 그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도구가 아니다. 폭력이 사라진 삶도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하려는 수단이 아닌, 내재적 가치다.
다시 말해 폭력이 사라지고 불평등이 줄어드는 것 자체가 본질이고 목표다. 그래야 권리와 삶의 질이 보장되는, 사람이 살만한 행복한 사회가 될 것 아닌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람답게 살아야 그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보는지, 여성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낙태죄 폐지를 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어떤 시각에서 낙태와 낙태죄를 묻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한참 전에(2016년 10월) 우리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논평 바로가기).
“여성의 몸을 도구로 보는 것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 완고한 전통이 갑자기 어디로 갈까, 지금 벌어지는 모든 저출산 정책도 여성을 그리고 여성의 몸을 도구로 보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난임시술 지원이 저출산 대책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현실을 웅변하다. 여성을 ‘열등한 타자’로 규정하는 데서 오는 귀결, 더도 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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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고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익숙한 프레임이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까지 결합해 있으니 더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여성은 재생산의 도구가 아니라 (그 어느 것이라도)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삶의 주체다.“
여성이 마치 금치산자나 되는 것 마냥,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누가 대신 결정하는가? 윤리와 의무는 또 누구의 시각에서 누가 내는 목소리인가? 일관된 원리는 이런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여성(사람)은, 그리고 여성(사람)의 몸은 도구가 아니다. 여성 또한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권리 주체이자 판단 주체이다.
한 가지 더, 심지어 미혼모 문제까지 인구, 출산, 노동력 확보와 연결하려는 경향이 걱정스럽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가 이를 꺼내 놓고 말하는 기회가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이 문제 또한 성차별과 불평등에서 자유롭지 않다.
인구 늘리기를 위해 새로운 정책을 말하는 것이면 수단과 목적이 바뀌었다. 인구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런 것일 뿐, 당사자의 삶과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먼저다. 그 여성도 차별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사회와 인구 변화의 하나로 저출산과 인구 감소의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사회가 이를 예상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나 이에 국가와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어떤 시각에서 어떤 사회적 대응을 하는 지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저출산과 인구 감소를 그 자체로 문제라거나 위기로 보기보다 ‘역사적 기회’로 해석한다. 현존하는 삶과 그 조건을 성찰하고 새로운 사회적 원리를 구성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사회적, 정치적 기회.
우리는 다가올 사회를 규율할 새로운 핵심 원리 중 하나가 성 평등이라 믿는다. 지금 분출하는 여성들의 증언과 항의, 그리고 새로운 요구야말로 새로 구성해야 할 사회적 원리의 토대가 될 것이 틀림없다. 말해야 할 사람들이 말하고, 들어야 할 사람들이 들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