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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위협하는 구조적 인종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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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찰의 흑인사살, 정신건강에 미친 영향은?

[서리풀 연구通] 정신건강 위협하는 구조적 인종주의

 

김 명 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총기 소유가 제한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개인들 사이의 사소한 폭력이나 공권력 집행이 총기를 사용한 무력 충돌로 진화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쉽다. 특히 공권력의 집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고한 희생은 심각한 문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라는 국가의 정당성 자체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공권력에 의해 발생하는 폭력 피해가 특정 집단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 사회에서 경찰에 의한 흑인 사살은 백인에 비해 3배 이상 많고, 특히 비무장 상태의 피의자가 살해되는 경우는 흑인이 백인 피해자에 비해 5배나 많다. 연간 300여 명의 흑인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는데, 그 중 최소 4분의 1 이상은 무장하지 않은 피의자라고 한다.

 

인종주의에 기초한 불공정한 공권력 집행과 사법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흑인에게 자행되는 무자비한 경찰 폭력은 최근 몇 년 동안 소셜미디어에서 중요한 이슈였다. 지난 2013년 2월 플로리다 주의 백인 자경단원이 과자와 음료수 봉투를 들고 있던 흑인 청소년을 수상한 외지인으로 의심하여 사살하고, 2급 살인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난 사건은 사회적 공분을 촉발시켰다. 이후 퍼거슨 시와 뉴욕 시에서 연달아 비무장한 흑인 청소년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대규모 거리시위와 온라인 상의 #BlackLivesMatter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 해시태그 운동이 이어졌다(☞참고 자료: ‘위키피디아’의 관련 항목). 미국 풋볼리그 (NFL) 선수들이 경기에 앞서 국가가 연주될 때 경례 대신 무릎을 꿇었던 것 또한 흑인에 대한 경찰의 무분별한 폭력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참고 자료: <뉴욕타임스> 2016년 9월 1일자 “This Time, Colin Kaepernick Takes a Stand by Kneeling”).

 

공권력에 의한 폭력은 피해 당사자 뿐 아니라 차별적으로 대우받는 정체성을 공유한 많은 이들의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컨대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지역사회에서 우울증이나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 환자가 많아진다는 논문이 발표되었고, 소셜미디어, 언론을 통해 몇몇 개인들의 사연이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인구집단 수준에서 학술적으로 입증한 연구결과는 아직까지 없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술지 중 하나인 랜싯 최근호에 실린 펜실바니아 대학 벤카타라마니(Venkataramani) 교수팀의 논문은 바로 이 가설을 입증하고자 했다(☞논문 바로 가기).

 

연구팀은 2013~2015년에 시행한 미국 건강행태 위험요인조사(BRFSS, Behavioral Risk Factor Surveillance System) 자료를 이용하여,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이 흑인들의 정신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 방식으로 평가했다.

 

경찰 폭력은 2013년 이후 미국에서의 경찰 사살을 추적한 ‘Mapping Police Violence (MPV)’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했다. 여기에는 희생자의 연령, 인종, 성별, 사건 당시 무장을 하고 있었는지, 피해 장소가 어디인지 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BRFSS 조사 일자를 기준으로 이전 3개월 내에 응답자가 거주하는 주(州)에서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이 있었는지 여부와 발생 숫자를 노출요인으로 정의했다. 정신건강 수준은 BRFSS 조사에서 지난 한 달 동안 정신건강이 ‘좋지 않음(not good)’이었던 날들이 며칠이었는지, 최소 1일 이상 정신건강이 좋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는지, 혹은 14일 이상의 정신적 불건강 상태를 경험했는지 여부를 통해 판별했다. 시기적 효과와 응답자의 성별, 연령, 학력 수준을 고려한 상태에서 노출요인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효과를 이중차분법(difference-in-difference) 방법으로 평가했다. 또한 효과의 특이성을 판단하기 위해 경찰에 의한 무장 흑인 혹은 비무장 백인 사살이 백인과 흑인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효과도 비교했다.

 

MPV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2013~2016년 동안 경찰에 의해 사살된 비무장 흑인은 303명이었으며, 비무장 백인은 330명이었다. 한편 사살된 무장 흑인은 753명, 무장 백인은 1426명으로, 비무장 상태에서 사살된 경우는 흑인(28.7%)이 백인(18.8%)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 기간 동안 BRFSS에 참여한 10만3710명의 흑인 중 3만8993명(가중 표본으로 하면 49%)이 지난 3개월 동안 자신이 거주하는 주에서 최소 한 건 이상의 경찰에 의한 비무장 흑인 사살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여타 요인들을 고려한 통계 모형에 기초할 때, 경찰에 의한 비무장 흑인 사살이 한 건이 늘어날 때마다 흑인들에게서 0.14일의 추가적인 정신적 불건강 상태(95% 신뢰구간 0.067~0.22일)가 확인되었다. 이는 인구집단 수준에서 3.3%(95% 신뢰구간 1.6~5.1%)의 상대적 증가를 의미했다. 또한 최소 한 건 이상의 경찰에 의한 비무장 흑인 사살 노출은 정신적 불건강 상태를 0.35일(0.03~0.67)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적 불건강 상태가 1일 이상 있었던 경우, 혹은 14일 이상 있었던 경우를 결과변수로 사용하여 분석했을 때에도 비슷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정적 효과가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이러한 폭력에 노출된 지 1~2개월 이내에 서베이에 참여한 경우였다.

 

이러한 결과의 타당도를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시나리오에서 비교분석을 한 결과가 <그림>에 제시되어 있다.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은 백인 응답자들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무장한 흑인의 사살이나 비무장 백인의 사살은 백인과 흑인 모두에서 정신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즉, 경찰의 폭력이 응답자들의 정신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비무장 흑인이 피해자이면서 응답자가 흑인인 경우가 유일했다.

 

[그림] 희생자의 인종에 따른 경찰 사살 사건 노출과 BRFSS 응답자의 인종에 따른 정신건강 수준 변화

(출처: https://doi.org/10.1016/S0140-6736(18)31130-9)

 

경찰에 의한 비무장 흑인 사살은 구조적 인종주의의 발현이라 할 수 있으며, 흑인들에게는 법 집행과 제도에서 흑인의 목숨이 ‘덜 가치있다’는 암묵적 신호로 읽힐 수 있다.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BlackLivesMatter’는 운동이 나타난 배경이다. 연구팀의 추정에 의하면,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이 유발한 흑인들의 정신건강 피해는 연간 약 5500만 일의 정신적 불건강 상태에 해당하며, 이는 당뇨병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필적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인종 간 건강불평등 요인으로써 구조적 인종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연구팀은 구조적 인종주의가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 이웃만이 아니라 흑인 사회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을 줄이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부정적 효과를 저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이전 ‘서리풀연구통'(☞바로 가기 : ‘그들’을 몰아내니 ‘우리’가 아팠다)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이들 연구는 모두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맥락으로 한 것이지만,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에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충격과 애도, 공포의 반응을 보였던 것, 2주 전 혜화역 시위에 6만 명의 젊은 여성이 모였던 것이 그것이다. 젠더폭력과 불법촬영 범죄의 만연, 성차별적 규범과 사법체계라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언제라도 내가 그러한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정체성 동일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인종이든 성별이든, 정체성에 기반한 구조적 차별은 피해 당사자만이 아니라 해당 정체성을 가진 집단 전체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볼 때, 이는 결코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라는 내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 사회의 반동적 대응도 비슷하다.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운동(#BlackLivesMatter)에 난데없이 “에헴”하며 ‘모든 목숨이 다 소중하지(#AllLivesMatter)’ 설교를 늘어놓거나, ‘편협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남녀 모두를 아우르는 이퀄리즘’이라며 그동안 보여주지 않던 인류애를 과시하는 행태가 그것이다. 구조적 차별에서 비롯된 정체성 집단의 우려와 분노, 건강피해를 해결하는 방법은 ‘위아더월드’를 외치며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적 차별을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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