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논평] 혁신성장의 동력이 기껏 의료 ‘영리화’라니
놀랍지만 또 놀랍지 않다. ‘설마’ 했던 일이니 놀랍고, ‘결국’이니 놀랍지 않다. 이 정부도 결국 기승전-영리의료로 되돌아왔다. 이전 정부와 무엇이 다르고 어쩌고 해봐야 대동소이, 오십보백보다. 다시 등장한 의료 영리화 정책의 놀라운 ‘일관성’에 대해서는 <프레시안>과 <라포르시안>의 분석을 참고하기 바란다(프레시안 바로가기, 라포르시안 바로가기).
이 행사와 정부 방침을 해석하는 법
첫째, 의료기기 규제완화는 보건의료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보건복지 정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통령이 참석해 이벤트와 상징을 만들었으니(기사 바로가기), 보건복지부 한 부처의 작품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모두 나선 혁신성장 프로젝트의 대표선수로 봐야 한다.
둘째, 정책이 아니라 ‘선전’부터 하고 나선 것을 빼놓기 어렵다. 대통령 행사 자리에 나타난 소아당뇨병 보호자의 사례가 정부가 하고 싶은 말, 국산 의료기기의 규제완화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이벤트다. 의료기기의 규제완화가 어떻게 경제성장과 건강에 이어지는지, 과학적 설명, 논리적 고리, 인과관계에 대한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환자의 고통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규제는 고통”이라는 정동을 만들고 이를 동력으로 삼으려 했다면, 나쁜 문화정치가 따로 없다.
셋째, 규제완화 담론이 다시 주류가 되었다는 것. 정부가 하려는 일의 핵심은 간단하다. 무차별로 규제를 풀겠다는 것이고, 단언컨대 이전 정부와 큰 차이가 없다. 혁신성장에는 말만 혁신이지 혁신적 전략이 없고, 규제개혁 또한 말만 개혁이지 ‘규제망국론’을 사수하는 중이다. 보건복지부가 낸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긴다
“개발이력이 짧고 연구결과가 부족하여 신의료기술평가에서 탈락하던 혁신·첨단 의료기술을 신속하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선제적 인허가 체계와 혁신가치에 대한 보상방안을 마련한다….연구결과 축적이 어려운 혁신·첨단 의료기술은 문헌 근거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혁신·첨단 의료기술의 잠재가치를 추가적으로 고려하여 시장 진입을 허용하는 별도 평가트랙을 운용한다.”
넷째, 건강을 비롯한 삶의 가치는 돈과 성장을 위한 도구로 소비된다.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하는 효율성은 둘째고, 사람의 생명과 건강에 관련된 기기에 안전성과 효과성을 무시하겠다는 방침이다. “연구결과가 부족”하고 “근거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시장에 진입하게 하겠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환자를 실험용으로 동원하겠다는 것을 빼고는 다른 의도를 알기 어렵다. 돈과 이윤을 위해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비도덕적’ 경제로, 반드시 역사에 남을 일이다. 규제완화에 애쓴다는 선전 정도로 그쳐야지, 정책으로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돈 버는’ 정책으로만 봐도 낙제점, 옹색하고 답답하다. 의료기기에 대한 규제완화가 수입대체, 수출, 경제적 부가가치, 일자리, 가계소득 증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무리 따져 봐도 알 길이 없다. 정부와 정책의 실력을 그대로 드러냈으니, 정책 논리가 구성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한국 정부의 오랜 고질병이다.
먼저, 이 산업이 그럴 만한 규모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낸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의료기기는 생산 5조 6천억, 수출 3조 4천억, 수입 3조 6천억 내외 규모다(보고서 바로가기). 어느 정도 크기인지 잘 모르겠다면, 다른 분야와 비교하면 된다. 건강보험은 2016년 기준 건강보험료 수입이 약 48조, 정부지원이 약 7조에 이른다. 아예 다른 산업, 반도체 수출액은 100조원을 넘고 심지어(?) 농림축산식품 수출도 7조원에 가깝다(자료 바로가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의료기기는 산업규모 자체가 아주 작다는 뜻이다.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자리에 왜 의료기기 산업이 뽑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 걸음 더, 어떤 규제를 어떻게 완화하면 이 작은 시장이 어떻게 커지고 혁신성장에 도움이 되는지에 이르면, 인과관계 논리를 연결할 도리가 없다. 그냥 지르고 보는 식에 “우리는 하노라고 했다”면서 노력을 알아 달라는 모양새. 게다가 결과와 성과는 다음 장관, 다음 정부에야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알 바 아니다가 아닌가? 정책이 아니라, 단기적으로 정부의 정당성을 수호하고 책임을 면하려는 전형적인 관료 정치다.
의료기기 규제완화로 촉발되었지만, 근본 문제는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혁신성장의 본질과 한계에서 비롯된다. 도대체 혁신성장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2017년 11월 열린 ‘대한민국 혁신성장 전략회의’에서 경제부총리가 발표한 전략에는 과학기술 혁신, 산업혁신, 사람 혁신, 사회제도 혁신이 들어있다(보도자료 바로가기).
따로 무언가를 숨겨두지 않았을 터.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였으니 지금까지 만든 최고, 최선의 것을 모은 종합판일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그동안의 경제 정책과 무엇이 다른가? ‘속도감’과 ‘성과’를 강조하니, 이것도 묻는다. 올해와 내년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는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는 있다. 제1차 혁신성장 관계장관회의 겸 제8차 경제장관회의 자리에서 부총리가 한 말에서 미루어 짐작한다. 우리는 이를 규제완화를 빼고는 다른 새로운 정책과 프로그램이 없다는 고백으로 읽는다. 혁신성장에는 혁신이 없다는 이 아니러니.
“혁신성장이 말로 그치지 않고 시장과 기업,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고 당부했다….이어 그는 “이해관계자의 대립이나 사회 이슈화로 혁신이 잘 안 되는 분야도 규제혁신 방안을 조속히 만들어 정부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겠다”라며…” (기사 바로가기)
동의하지 않지만 이것도 그렇다 치자. 혁신성장의 핵심, 전가의 보도로 쓰는 규제완화에는 정말 무슨 대단한 것이 있나? 아니다. 얼마 전에 경총이 제안한 아홉 가지 ‘핵심’ 규제완화 요구를 보면, 그토록 목을 매는 규제완화가 이게 전부인가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경총 보도자료 바로가기).
▲영리병원 설립 허용 ▲원격의료 규제 개선 ▲의사, 간호사 인력 공급 확대 ▲인터넷 전문은행에 대한 은산분리 완화 ▲프랜차이즈 산업 규제 개선 ▲산업과 경제의 디지털화에 따른 노동관계법 개정 ▲드럭스토어 산업 활성화 ▲5G 투자에 대한 지원 확대 ▲고령자에 대한 파견허용 업무 규제 폐지.
이런 상황에서도 대통령과 정부가 함께 의료기기 규제를 풀겠다고 한 ‘선언’의 뜻은 분명하다. 대통령과 정부 전체가 경제 부처(또는 이것이 대표하는 ‘경제권력’)의 혁신성장론과 규제완화론에 포획되었다고 보면, 의료기기 규제완화는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의료기기를 말하면서 “다른 분야 규제혁신 활기”를 기대한다고 하니(기사 바로가기), 지금 외형 성장과 시장 만능을 특성으로 삼는 ‘사회경제체제’의 성격을 명확히 정한 것이다.
본색을 드러낸 것이든 이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든, 우리는 이런 방향에 동의하기 어렵다. 다음과 같은 질문과 가치 판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런 규제완화와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누구의 소득이 늘고 어떤 일자리가 느는가? 비용은 누가 부담하고 시행착오의 피해는 누가 감당해야 할까?
또 한 가지, 정부와 정책의 ‘무능’도 문제다. 정부 행동은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는 (일부가 아니라) 전체 사회에 바람직한 것이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하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합리적 논리와 근거에 기초해야 한다. 이런 행동을 과학적 근거에 토대를 둔(evidence-based) 정책이라 한다. 혁신, 성장, 규제 그 무엇이든, 제발 ‘믿음(faith)’이나 의견이 아니라 최소한의 과학적 근거가 판단과 행동 기준이 되길 바란다.
장고 끝에 기껏 의료기기 규제완화를 내놓았으니, 우리는 이를 현 정부의 한계치라 생각한다. 혁신성장 전략 또한 철학, 정치, 정책에서 모두 실패할 가능성이 커졌다. 미련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토대부터 새롭게 구축하기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