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연구通] 무역 압력이 건강정책 도입을 막는 방식
오로라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호주의 담배포장 규제정책 때문에 촉발된 무역 분쟁에서, 모처럼 세계무역기구(이하 WTO)가 담배규제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려 화제가 되고 있다(☞관련 기사 : WTO “담배포장 경고그림, 건강 위한 것…무역장벽 아냐“). WTO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유무역보다 건강보호를 지지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호주는 강력한 담배 규제정책으로 유명하다. 담배가격이 비싸고 흡연구역에 대한 규제가 엄격할 뿐 아니라, 2012년에는 세계 최초로 민무늬 담뱃갑(plain packaging)을 의무화 했다. ‘민무늬 담뱃갑’이란 담배 포장에 담배의 맛, 향, 회사로고 표시 없이 회사명만 기재할 수 있으며, 흡연의 폐해를 알리는 경고 그림과 문구를 강조하는 포장규정을 의미한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담배들의 세련된 디자인과 비교해보면 호주의 담배 포장은 그야말로 ‘혐짤’ 수준이다. 민무늬 담배갑 정책은 담배 마케팅에 대한 상당히 강도 높은 규제로, 담배 기업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왔다.
▲ 호주의 민무늬 담배갑 포장 (출처 세계보건기구 )
이번 WTO의 결정을 두고 국내외 언론은 매우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최소한 담뱃갑 포장 규제를 둘러싼 무역 분쟁에서 향후 비슷한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도 높아졌다. 하지만 WTO의 이번 결정을 칭송하는 상황 자체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WTO가 건강정책에 간섭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건강에 해로운 제품을 규제하는 것은 보건학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이러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이해와 충)돌한다. 힘이 센 다국적 기업일수록 이러한 규제 정책에 거세게 저항하기 마련이다. 정부는 규제 정책을 도입하기 위해서 정치적, 행정적, 법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 호주의 경우에도 민무늬 담뱃갑 정책 옹호를 위한 변호사 선임 등 소송비용에만 무려 4000만 달러에 가까운 비용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관련 기사 : “호주, 민무늬 담뱃갑 옹호에 3900만 달러 사용“).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학술지 <플로스 의학(PLOS Medicine)> 최근호에는 무역이 건강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논문 바로 가기 : 비감염성 질병 예방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WTO TBT 위원회의 비공식적 문제제기들).
연구팀은 세계무역기구가 창설된 1995년부터 2016년까지 WTO 122개 회원국들이 만성질환 예방을 위한 “식품, 음료, 담배에 대한 규제” 도입 과정에서 무역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무역 관련 문제제기(trade challenges)”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WTO의 무역기술장벽(TBT) 협정에 따르면 정부는 무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제를 자국에 도입할 때 관련 국가들에 미리 고지하여 산업계로부터 충분한 피드백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면 관련 국가들은 이를 검토하고 TBT 위원회를 통해 규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등 규제도입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 문제제기의 유형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분석 결과, 1995년부터 2016년까지 총 93건의 식품, 음료, 담배에 대한 규제정책들이 WTO TBT 위원회에서 문제시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전체 문제 제기 중 18%, 건강관련 문제 중 38% 차지). 문제제기를 받은 규제정책의 수는 매년 늘어났으며(1995년 0건→2014년 13건), 대부분(74%)이 자국에서 정책이 승인되거나 적용되기도 전에 WTO에서 문제시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문제제기는 보통 1회가 아니라 2회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즉, 각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규제정책을 도입하고자 할 때 무역기구를 통해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식품, 음료, 담배에 대한 규제정책들이 TBT 위원회에서 당면했던 문제제기에는 “불필요한 무역 장벽”이 가장 높은 비중(16%)을 차지했다. 이는 규제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다른 대안(무역 장벽이 되지 않는, 즉 업계에 덜 부담스러운 방안)을 통해서도 똑같이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 규제 반대 논리로 가장 많이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페루 정부가 설탕·소금·지방 함유량이 높은 제품에 건강경고문 표시를 의무화하고 학교 내 판매를 제한하는 건강정책을 도입하고자 했을 때, 멕시코가 나서서 ‘일일 식사 가이드 제공’을 대안으로 권고한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게다가 무역문제를 제기하는 국가와 이를 받는 국가 사이에는 상당한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했다. 중하위, 저소득 국가들이 받은 무역 관련 문제제기의 3/4 이상(77%)이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 회원국 같은 고소득 국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국제적 권력 관계 속에서 건강정책 도입을 가로막는 무역 압력이 약소국에게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WTO 위원회에서의 문제 제기 때문에 정부가 위축되는 “된서리 효과(chilling effect)”가 실제 건강정책 도입을 저해했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제제기가 있었던 건강정책들이 실제 해당 국가에서 도입되었는지, 혹은 지연, 변경, 철회되었는지 여부를 WTO가 추적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모두 파악할 수 없었다. 연구팀은 이러한 한계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례 분석을 실시했다. 무역 관련 압력이 확실히 존재하며(강대국 → 약소국 문제제기), 정책 도입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던 인도네시아, 칠레, 콜롬비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례를 분석했다. 이들 국가의 규제정책 사례 모두 상당한 변화를 겪어야 했는데, 이 글에서는 칠레의 사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2013년 칠레는 설탕이나 지방 함유량이 높은 제품에 “STOP” 표시 부착(전체 포장 면적의 20% 이상을 차지, 색깔은 검정색 또는 빨간색)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호주, 스위스, 캐나다 등 선진국들이 WTO TBT 위원회에서 무려 8차례에 걸쳐 라벨의 크기와 색깔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결국 칠레는 정책 적용 시기를 3년 연장했으며 라벨 크기도 전체 포장의 4~7% 크기로 줄였다. 즉, 정책의 규제 강도를 상당히 낮춘 것이다.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공식적 무역 분쟁으로 아직 표출되지 않는 TBT 회의에서의 비공식적 문제제기가 각국의 건강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러한 압력이 저소득 국가에게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를 염두에 둔다면, 호주의 민무늬 담뱃갑 무역 분쟁 승소는 건강의 가치를 고려하는 WTO의 현명한 결정이라기보다 무역 분쟁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압력을 이겨낸 호주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호주가 저소득 국가, 약소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연구팀이 분석한 식품, 음료, 담배에 대한 규제정책들 중 분쟁까지 간 경우는 1건 뿐이었고, 그것이 바로 호주의 민무늬 담뱃갑 무역 분쟁이었다. 즉, 분쟁까지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국가적 의지와 법적, 정치적, 경제적 힘이 필요하다.
주의해서 해석해야 할 부분은, 연구팀이 드러낸 숨은 무역압력조차 여전히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역 협정은 WTO 협정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정부가 정책 도입을 고려하고 논의하는 시점부터 무역압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역 문제가 예상되는 건강 정책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자체 검열이 있기 마련이고, 설사 추진 쪽으로 방향이 정해진다고 해도 정부 부처(예컨대 보건부 vs. 무역 관련 경제부처)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부의 상당한 의지 없이는 국제적 무역 분쟁으로 발전하기 전에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
건강정책과 국제 무역협정은 전혀 관계없는 분야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제대로 된 건강정책과 규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레토릭 뒤에 가려진 정치적․경제적 힘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표면적으로 WTO는 TBT 협정에서 자국민의 건강보호나 안전 등 합리적 목적을 위한 규제라면 그것이 설사 무역 장벽을 증가시키는 조치라 해도 지지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강력하게 뿌리내린 국제적 산업자본의 힘에 맞서 건강권을 수호하려면 무역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와 감시가 절실히 필요하다.
▲ WHO가 권고한 담뱃갑 포장. ⓒWHO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