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의료 쪽에서 쓰는 말 중에는 암호 같은 말이 많다. 그 중에 최근 들어 유행하는 말 한 가지가 ‘빅 5’이다. 서울의 큰 병원 다섯 군데를 가리킨다.
그냥 규모가 큰 것보다는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모르는 이가 드물다.
‘빅 5’라는 말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 ‘빅’으로도 모자랄 성싶다. 며칠 전 여러 언론에 보도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이른바 빅 5병원이 차지하는 진료비 비중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중에 상급종합병원(건강보험에서 쓰는 말인데, 대학병원이나 3차 병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이 가져가는 비용은 2011년 현재 7조 2,500억원 정도다. 그런데 이 중 35% 가량인 2조 5천억원을 빅 5가 쓴다(전체 진료비 중에서는 어림잡아 7%를 좀 넘는다).
벌써 비중이 크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게 계속 늘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점유율은 2007년 33.1%, 2009년 33.5%, 그리고 2011년 35.0%로 꾸준히 오르고 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으니 처음 있는 일이다. 다른 나라에는 지금도 이런 일이 드물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겹친 결과이다.
크게 봐도, 환자들이 대형 병원을 주로 찾아가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그 때문이겠지만, 병원 규모가 따라서 커지는 것이 다른 원인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시간으로 앞뒤를 가릴 수 없이 맞물려 있다.
더 근본적으로 따지면, 환자들이 왜 대형 병원을 앞 다투어 찾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간단한 의문이 만만해 보이지만 실은 어렵다. 워낙 여러 가지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환자를 비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하겠다. 어리석고 욕심 많은 환자들이 무조건 더 좋은 병원과 명의를 찾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병에 걸리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찾는다. 물론 잘 모를 수 있고, 잘못된 정보에 정신을 빼앗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일 큰 병원을 찾아 KTX를 탈 때에, 그리고 소문난 명의에게 하루라도 빨리 진료를 받으려고 온갖 수소문을 할 때, 괜한 허영으로 그러겠는가.
그러니 나보다 병이 더 중한 사람이 많으니 큰 병원 이용을 삼가자고 해서는 답이 안 된다. 우리 지역 발전을 위해, 보험 재정을 아끼기 위해, 동네 병원을 이용하자는 말이 먹힐 리 없다.
근본 원인이야 무엇이든, 환자는 더 잘 고치고 더 좋은 병원과 의사를 찾아 움직인다. 지금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사정이 되고 여유가 생기면 똑 같은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지금대로 가면 환자 집중 현상이 심해질 것이라는 말이 된다. 진료비나 환자 수, 무엇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동네 병원의 비중이 나날이 줄어드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동네 병원의 질적 수준, 의료전달체계, 건강보험제도, 한국 사람들의 문화…. 꼽자면 원인은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당분간 원인은 제쳐 놓고 현재 벌어진 결과에 집중하자.
대형 병원은 더욱 커지고 동네 병원은 쪼그라지는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될까. 이 대목에서 ‘경제 민주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경제 민주화는 이번 대선의 핵심 쟁점 중 하나다. 그런데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그래도 공감대가 큰 것을 찾아본다.
<구글에서 “빅5 병원”으로 검색하면 게시되는 기사들>
헌법 119조 2항이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여전히 해석이 갈리겠지만, 소득의 분배와 독점의 규제가 핵심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더불어, 균형 있는 성장, 주체 간의 조화, 민주화 같은 것을 지향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제 민주화가 이런 것이라면, 대형 병원의 독주와 환자 집중에서 ‘의료 민주화’라는 대구(對句)를 읽어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실 비슷한 점이 많고, 그 중에서도 독점과 집중의 폐해가 더욱 그렇다.
실제 대기업이 의료에 진출한 것은 빼고, 다른 것 몇 가지만 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대형 병원이, 재벌이 그러하듯, 한국 보건의료가 나아갈 길을 독점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한국 보건의료가 ‘발전’했다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모델이 있다. 외국인에게 삼성전자나 포스코를 견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 의료의 발전상을 보이느라 빅 5 병원에 데리고 간다.
가장 최신의 장비, 고급 호텔에 버금가는 시설, 대규모의 자동 ‘생산’체제, 전문화를 넘어선 초(超) 전문화, 기업식 관리방식과 경영기법 등이 모델의 핵심요소를 차지한다. 보건의료의 궁극적 발전은 곧 이런 것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다.
대형 병원의 독과점 구조는 이런 의료가 곧 좋은 것이고 베스트라는 신화를 강고하게 만든다. 반면, 지역보건이나 인간적 관계를 중시하는 일차진료 같은 모델은 살아남을 수 없다. 재벌 기업의 미래가 곧 한국 경제의 미래라는 지배적 관념이 만들어진 것과 꼭 같다.
두 번째 폐해는 앞의 것과 연관된 것이다. 대형 병원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고, 앞으로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일탈과 불법을 저지르고 정부 정책에 반대를 일삼는다는 뜻이 아니다. 재벌인들 어디 그런가. 비중과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대형 병원의 이해를 거슬러, 또는 대형 병원을 고려하지 않고 무슨 결정을 하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이다.
대형 병원의 비중이 커질수록 사회적 통제에 맞서는 권력은 커진다. 권력은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작동하는 힘을 말한다.
통제는 괜히 기분 나빠 하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고삐를 벗어나면 사회 전체를 위해 추진해야 할 일들을 막고 나선다. 예를 들어 진료비 제도, 건강보험 진료비(수가) 결정, 또는 동네 병원의 발전방안 같은 정책의 처지가 모두 궁색해진다.
세 번째 문제는 독점과 집중이 환자들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서울로, 대형 병원으로, 그리고 최고 시설과 장비의 의료로 자원이 더욱 쏠린다. 지역, 계층, 집단 사이에 불평등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폐해에 동의하면 이제 해결책이 나올 순서다. 그러나 아직 이르다. 처방에 앞서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총론조차 반대가 만만치 않다. 바람직함과 현실론이 부닥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정에도 우리는 대형 병원의 독점과 집중이 한국 보건의료의 중요한 개혁 의제라고 믿는다. 구체적인 방안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하겠으나, 우선은 폐해를 인식하고 해결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중요하다.
이번에는 제쳐 놓는다고 앞에서 말했지만, 원인을 제대로 찾는 것도 급하다. 정확한 진단이 좋은 처방으로 이어진다. 환자가 동네 병원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면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해결책이 나온다.
그리 엄밀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개념이라고 눈을 치켜뜰 필요는 없다. 경제 민주화의 힘을 빌려 의료 민주화를 논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새로운 힘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