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에서는 대법관 인준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미드’ 속에 나올 법한 아수라장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다. 처음에는 후보자의 정치 성향 때문에 그렇겠거니 했으나, 이제는 성폭력을 저질렀는지 여부를 두고 시끄럽다.
남의 나라 대법관에 관심을 가질 형편은 아니나, 말이 나올 때마다 한국의 사법부, 대법원, 대법관과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출신 대학 학생들이 대법관 인준을 반대했다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두 여성이 상원의원에게 항의한 덕분에 인준 절차가 연기되었다는 등의 흥미 위주의 보도 때문만은 아니다.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한국 법원의 사법 농단 사태는 미국과 얼마나 다른가? 시시콜콜 이런 것까지 따지는 미국을 부럽다 해야 하나, 아니면 당파적 이해관계만 남은 미국 의회보다는 한국 국회가 (사법부에 대한 것만큼은) 덜 편파적이라 해야 할 것인가?
계기는 다르나 근본에서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은 똑 닮았다. 피상적으로 보더라도 민주주의를 거론할 수밖에 없으니, 먼저 ‘삼권분립’이라는 오랜 상식에 반하는 것. 대통령에 끌려다니며 방탄 역할을 하는 미국 의회도 그렇지만, 한국의 국회도 제 역할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자기 이익을 수호하는 사법부에 대해 아무런 힘도, 의지도, 아이디어도 없는 입법부란! 이를 삼권분립의 원리라 부르고 근대 국가의 운영 원리라 하면, 그런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도 있다. “대법관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임명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지는가?” “누가, 무슨 근거로, 사법부에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는가?” 역사적 상식이라며 삼권분립을 말하는 것은 안이하고 나태할 뿐, 민주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말에 답할 능력이 없다. 왜 법관은 선출하지 않는가? 주권자가 탄핵할 수 없는가?
근본에서 민주주의를 문제 삼으면 사법부만 시비할 수 없다. 늘 부닥치는 문제, 행정과 행정부의 민주주의적 원리가 더 자주 중요하고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행정과 행정부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넓은 범위에서, 일상이고 영향이며 운명이다. 입법부와 사법부보다 민주주의 원리에 더 충실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남북문제는 행정이라기보다는 정치라 치자. 집값과 전·월세 가격이 그토록 중요하지만, 뼈대가 되는 결정은 늘 크고 비싼 집을 가진 사람들 손에 달렸다. 보유세를 비롯한 부동산 조세 정책은 더하다. 행정부와 관료는 자신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할 뿐, 자세하게 묻지 않고 충실하게 듣지 않는다. 관료의 공평무사 또는 철인정치의 신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이런 결정을 민주적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이른바 문재인 케어도 또 다른 예다. 건강보험과 그 보장성은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국가 중대사’가 아닌가. 어떻게 진행 중인지 어디로 가는지 보통 사람은 알 길이 없는 틈에, 중요한 결정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다. 며칠 전에도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추진 방침을 합의했다는 소식이 돌출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그들의 합의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냥 앉아서 기다려야 하나.
합의 내용에 문제가 있고 없고를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과정과 결정을 행정부와 관료가 독점하는 것, 그 구조를 문제로 올린다. 의사협회와 합의하기로 한 것부터 그들의 결정이며, 이런 합의가 문재인 케어 진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그 또한 구조적 판단이다. 결정 과정에 대한 통제, 그것도 독점적 통제다.
관료와 행정이 동원하는 이유와 명분이야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우리도 그 논리를 모르지 않는다. 국민의 편익에는 별 영향이 없다, 전문적인 내용이다, 실무적 문제다, 무슨 결정이 아니라 원칙을 다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민주적 결정에 맡기는 대신 국회에는 충실하게 보고한다 등등.
그런 관료적 명분을 기각하는 근거도 차고 넘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동안 관료가 독점한 의사결정의 실패와 병폐들이 생생한 증거들이다. 지난 정부의 그 많은 ‘적폐’는 정치의 실패지만 행정과 관료의 실패이기도 하다.
관료와 행정부는 어느 정도까지 연속적이니 이 정부에서도 그들의 민주성은 크게 진전이 없다. 혁신성장과 규제 개혁을 둘러싼 논란, 재벌 경제체제의 개혁, 영리 의료에 대한 시비, 부동산 정책, 증세와 복지 확대 등을 보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기울어진 권력 지형(예를 들어 언론)에만 의존하는 관료적 논리가 압도한다.
지난 탄핵과 대통령 선거가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착시를 일으킬 만하다. 민주주의를 말하면 흔히 제도와 구조(예를 들어 국회, 투표 등)로 이해하지만, 우리는 이제야말로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를 말할 때라 판단한다. 지금 다시 물어야 할 것은 한 마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보통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는 어디서 어떻게 정책과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나?”
최저임금을 정할 때, 서울의 주택공급을 늘리기 위해 그린벨트를 푼다고 할 때, 보건소가 치매관리사업을 한다고 계획할 때, 중고생의 두발 자유화를 논의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 의견을 전해야 하나? 의견과 여론이 엇갈리면 어디서 어떻게 공론을 만들어갈 수 있나? 혜택과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도 그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개입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 정답은 찾기 어렵지만, 당장 많은 사람이 결국 ‘제도’가 중요하지 않으냐고 말할 것이다. 동의한다. 민주적 결정을 요구하고 그런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마음과 태도만으로 민주주의가 진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활세계까지 모세혈관처럼 스며드는 민주주의의 구조가 중요하다.
여기서 다시 순환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 딜레마다. 민주주의의 구조가 확장하고 성숙하려면 다시 민주주의의 토대가 튼튼해야 한다는 요구. 그 토대는 다시 생활세계를 민주화하는 과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허약한 토대와 부실한 구조의 책임 미루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엉거주춤한 타협에 앞서, 현실을 변형하는 데는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가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12년 12월의 <서리풀 논평>에서 말한 제도의 힘이다(논평 바로가기 프레시안 바로가기).
“제도의 변화(이 경우에는 참여예산제)가 참여와 민주를 얼마나 촉진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더 많은 관심은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의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서 제도와 체제를 바꿀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오래된 질문의 방향을 뒤집는다….
(중략)…미국 브라운 대학 바이오키 교수팀은 브라질에서 참여예산제를 시행한 지방정부 네 곳과 그렇지 않은 네 곳을 비교해 책으로 펴냈다. 그 결과 (참여예산제라는) ‘제도’가 사람들의 참여를 크게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마다 참여의 모양과 수준은 달랐지만, 제도를 시행한 곳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보통 사람들의 참여를 촉진한 것은 분명했다.
가장 적게 변화가 일어난 곳에서도 하다못해 정보의 양은 훨씬 늘어났다. 더 투명해지고 시민들이 요구를 반영할 공간이 생긴 것이다. 해석하자면, 조금 더 나은 제도가 조금 더 많은 참여를 이끌어 냈다.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도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의 동력이다.“
민주주의를 근거와 원리로 삼는 국가(입법, 사법, 행정)는 시민의 역량을 탓하기에 앞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제도와 구조를 설계하고 실천할 책임이 있다. 입법, 사법, 행정 가릴 것 없이, 지역과 동네에 이르는 미시적인 수준까지, 민주적 제도를 더 확대해야 한다.
10년, 20년 전통을 쌓은 제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며 실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도입, 법관을 선거로 선출하거나 국회에서 탄핵하는 것, 문재인 케어를 논의·심의·결정하는 ‘특별 회의’를 설치하는 것, 또는 보건소 예산 편성에 주민위원회의 승인을 받게 하는 것.
법과 행정 논리에 어긋난다고? 법과 행정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힘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