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돌아가며 시설을 바꿔가며 ‘참사’는 끊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서울 한복판 종로, 그리고 고시원이다. 어떤 이는 안타까워하고 또 어떤 이는 분노했겠으나, 매우 놀란 사람은 적을 것이다. 예상하고 걱정하던 일이 또 터진 것이 아닐까.
일곱 명이 목숨을 잃고 11명이 다친 사고가 놀랍지 않다니, 우리 사회의 어두움이고 시대의 불행이다. 그만큼 위험하고 불안한 삶의 공간. 강 건너에서는 ‘똘똘한 한 채’로 수억 원의 시세 차익을 말하는데, 맞은 편 어느 곳에서는 2층 24개, 3층 29개 방이 빼곡한 ‘벌집’이 공존하는 두 개의 나라, 갈라진 사회.
장소와 형태는 다르나 그동안 줄곧 했던 말에서 고칠 것을 잘 찾지 못하겠다. 진단과 처방이 크게 나아가지 못했으니, 그저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밖에. 언제까지 위험과 주거 불안을 방치할 것인지, 이토록 고질적이니 앞날도 낙관하지 못한다.
첫째, 화재를 비롯한 사고와 재난. 달라질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정부도 실패했다. 법과 규정을 만들고 점검과 감독을 했겠지만, 화재를 예방하고 참사를 막는 데 무력했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할 의무가 없고, 안전과 소방 점검도 꼬박꼬박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건물을 여러 차례 증축했고 그 과정에서 건축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정도 위법이야 어디 한두 군데인가.” (논평 바로가기)
“시장 원리가 늘 그렇지만, 사고와 생명 훼손이 분산되면 책임까지 개인화한다. 개인화는 또한 눈에 잘 띄지 않는 ‘비가시화’이기도 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각자의 원룸과 옥탑방에서 따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국정 책임자와 집권당에 따질 수 없고 나를 책망해야 한다.” (논평 바로가기)
“‘투자’(썩 좋은 용어는 아니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벌써부터 작은 요양병원에도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국가의 재정지원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나온다. 내내 이 타령을 하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갈까 걱정스럽다….(중략)…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논리와 힘이 근본에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안전과 생명을 위한 투자를 흔히 비효율로 보는, 이미 굳어버린 구조와 문화. 이것을 어떻게 이기고 고쳐 나갈지가 더 큰 사회적 과제다.” (논평 바로가기)
둘째, 안전과 건강 측면에서 주거 복지 또한 오랜 관심이었다. ‘구조’ 문제라 하면, 짧은 기간 안에 크게 달라질 수 없다.
“한국의 사회경제체제와 시장경제에서 집이 어떻게 상품화, 자본화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조와 시간과 경험이 축적되면서 집과 주거가, 또한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도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주거 빈곤과 불평등, 비용 부담과 사회적 낭비는 용인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논평 바로가기)
“원인에서 결과에 이르는 전체 과정에서 생명과 건강, 그리고 복지를 기초로 주거의 원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집과 주거는 시세, 부동산, 부채, 주택청약저축, 전세와 월세, 투기, 위장전입 문제 그 이상이다….(중략)…주거지원을 비롯한 주거복지, 지역사회 복지사업, 일자리 등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맞다. 특히 주거취약 상태가 구조적이고 만성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논평 바로가기)
안전과 주거가 가야할 방향도 거의 그대로다. 지금까지 경과로 보면 이런 주장이 참으로 공허하지만, 아직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다시 같은 제안을 되풀이할 수밖에(논평 바로가기).
‘확대된 공공성’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이 시스템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가치, 규범, 행동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개인과 개별 주체의 ‘품행’에 이르도록 ‘인도한다’. 그래야 법과 규정, 행정 책임의 빈 곳을 주체의 힘으로 촘촘하게 채울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국가와 정부의 공적 기능에 개입하는 시민사회(사회권력)의 역할이 중요하다. 병원을 예로 들자면, 시민과 지역사회 주민, 병원 직원과 노동조합, 환자와 보호자가 실질적인 권력을 축적하고 안전/생명/건강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권력에 포섭되거나 동원되지 않고, 국가권력의 통치를 능동적으로 변형하는 것. 이것이 ‘확대된 공공성’을 바탕으로 정부 실패와 시장 실패를 동시에 넘어서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우리 사회에서 참사와 ‘홈리스’가 끊이지 않으나(그래서 이 <논평>도 이를 되풀이해서 다루었으나), 현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큰일이, 그것도 아주 큰 일이 있어야 희미한 기억을 되살릴 뿐이다.
‘가난한 자’들의 삶의 역사는 현실에 개입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피붙이조차 애도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흔히 기억이 지겹다고 말한다.
확대된 공공성과 시민사회를 말했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출발할 수 없고 토대를 만들기도 어렵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것, 그리하여 기억의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실천 과제다. 망각과 싸우며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기억을 호출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