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연구通] 디지털 성범죄가 낳는 건강 피해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
최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2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기존 법은 동의 없이 다른 사람의 신체를 촬영하고 유포하는 것을 성범죄로 인정하고 이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여기에 빈틈이 존재했다. 만일 피해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몸을 촬영한 경우라면, 제3자가 이를 동의 없이 유포해도 법원은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개정안은 자신의 신체를 촬영한 촬영물이라 해도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유포된 경우에는 이를 성폭력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관련 기사 : 동의 없이 다른 사람 신체촬영, 유포하면 벌금 최대 3000만 원).
이러한 변화는 소셜 미디어와 스마트폰, 인터넷이 일상이 된 세상에 맞춰 진화한 새로운 형태의 성적 폭력을 뒤늦게나마 반영한 것이다. 그동안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 일구어 낸 값진 성과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온·오프라인에서 디지털 기기와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여 저지르는 젠더 기반 폭력으로, 동의 없이 상대의 신체를 촬영하거나 유포, 유포 협박, 저장, 전시함으로써 타인의 성적 자율권과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지칭한다(☞관련 페이지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디지털 성범죄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또 그 수법이 진화하고 있다(☞관련 기사 : 디지털 성범죄 지난 5년간 4배 이상 증가).
특히 불법 촬영으로 인한 피해의 대부분이 전 연인, 전 배우자 등 친밀한 관계나 학교, 회사 등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디지털 성범죄가 일상적인 젠더 권력 위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관련 자료 : 여성가족부 정책브리핑 – ‘디지털 성범죄 피해 지원 100일’ 1040명의 피해자에 7994건 지원 실시).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심리적 피해를 준다. 피해자들은 지속적인 공포와 무력감을 경험하며 이는 종종 공황 발작이나 섭식 장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외부의 도움을 구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중 절반 이상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해외 보고(☞관련 논문 : 효과적인 리벤지 포르노 법의 초안 – 법제화를 위한 지침), 영상 삭제를 의뢰했던 피해자에게 전화하면 자살했다는 답변을 빈번히 듣는다는 국내 보도(☞관련 기사 : “몰카 피해자에게 전화하면 ‘자살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디지털 성범죄는 중요한 공중보건문제인 셈이다.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들은 어떤 정신 건강 문제들을 겪게 될까? 2016년 <페미니스트 범죄학(Feminist Criminology)>에는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들이 겪게 되는 정신 건강 피해를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관련 논문 : 리벤지 포르노와 정신 건강 – 리벤지 포르노 피해를 입은 여성 생존자에게 미친 정신 건강 영향에 대한 질적 분석). 이 연구는 18명의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를 인터뷰하고 이들이 겪은 피해와 이를 견디고 대응했던 과정을 분석했다. 이 연구에서는 성별과 성적 지향을 특별히 제한하지 않고 18세 이상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를 모집했는데, 참여자 모두 여성 이성애자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연구 참여자 대부분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사진이 공개되는 피해를 입은 이들이었다.
분석 결과,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들의 정신건강 문제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유형화할 수 있었다. 첫째, 가깝게 지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거나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이로부터 피해를 당한 생존자들은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호소했다. 새로 옮긴 직장에서도 가능하면 사회적 교류를 줄이고, 남성들과 가벼운 관계조차 맺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둘째, 생존자들은 높은 확률로 자살 충동을 느끼고,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이나 우울증, 불안 장애 등을 진단받았다. 인터넷에 공개된 자신의 사진을 강박적으로 검색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일상 생활이 무너지고, 불안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디지털 성범죄 때문에 직장을 잃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신상이 공개되고 집으로 낯선 남성들이 찾아오면서 거주지를 옮기고 혼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된 생존자도 있었다. 셋째, 많은 생존자들은 피해를 겪은 이후 자존감과 자신감 저하를 겪었다. 사적 영상과 사진을 빌미로 한 협박 때문에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고통을 받기도 했다. 또한 지금도 자신의 사진이 유통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미래에 유사한 일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는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이어졌다.
생존자들은 피해 직후 사건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거나 멀리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성폭력 생존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과도한 음주도 흔한 대응 방식의 하나였다. 한 때 서로 사랑하고 믿었던 파트너가 왜 이렇게까지 잔혹한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가해자의 행동과 그 이유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존자들은 차츰 긍정적인 대응 기제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상담과 치료를 받았다. 사건을 공개적으로 의제화하고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거나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것도 중요한 대응 기제였다. 직장 동료들에게 자신이 강간당하는 영상이 전송된 이후 직장을 잃은 한 생존자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했다. 생존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설이나 대본으로 쓰기도 했다.
연구자는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토대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정신적 피해와 대응이 여타의 성폭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했다. 기존의 성폭력 대응 과정에서 나타나는 피해자 비난이나 2차 가해, 솜방망이 처벌 등은 디지털 성범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는 했다.
논문에 소개된 상황은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인들의 범죄행위를 넘어서, 심지어 불법 촬영물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온 웹하드 카르텔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지만 디지털 성범죄를 어떻게 예방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지에 대한 본격적 대책은 아직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보건의료 영역만 본다 해도,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한 젠더 폭력에 대한 체계적 대응이 매우 불충분하다. 실제로 공중보건과 의료서비스 영역 모두에서 젠더 폭력에 대한 이해가 낮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문성, 제도, 지식 모두가 부족하기 그지없다. 보건의료체계와 의료기관의 역할이 증거 채취와 상해에 대한 치료,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특히나 디지털성폭력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가 남지 않는 문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 소개한 논문에서 확인했듯, 디지털 성범죄는 정신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디지털 성범죄 자체의 예방과 가해자 처벌뿐 아니라, 피해자의 건강 피해를 최소화하고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게 돕는 사회적 대응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