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의(醫)-산(産)-언(言)’ 복합체를 해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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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명 가까운 전문의가 한 자리에 모였다. 어려울 텐데 방송의 재주가 참 용하다. 아니면 역시 방송이 힘이 센가. 이들이 모여 앉아 낯익은 연예인들과 의학 지식을 겨룬다. 또 다른 종편 채널에서는 방송에 단골 출연하는 부부 의사가 보인다.

그런가 싶더니 홈 쇼핑 채널 역시 비슷한 얼굴들이 나타나 열심히 건강식품을 설명한다. 방송인지 광고인지 영 분간하기 어렵다. 어디 그 뿐이랴. 건강이나 의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기’ 프로그램에서도 재주 있는 사람들의 간접 교육이 활발하다.

전에도 아주 없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채널이 늘어나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의학 프로그램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생활정보 프로그램이니 ‘인포테인먼트’ 형식이니 하면서 주력 상품이라도 된 느낌이다.

‘정통’ 의학 프로그램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그리고 영역이 무엇이든 한두 꼭지쯤 의학이 들어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의학 전문 채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사정이 이러니 오히려 역할이나 인기가 시들하다.

방송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신문의 의학 면이야 오래 전부터 있던 것이니 이젠 자연스러운 일상과 같다. 쉬우니 어려우니 광고니 공익이니 하지만, 꿋꿋하게 한결 같다. 방송에 비해 우직하거나 안이하게 보이는 것이 문제라면 문젤까.

그냥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다. 어차피 웃어넘기면 그 뿐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정보의 질로 보자면 단편적이고 휘발성이 강해 큰 영향이 없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신문보다는 방송이 그렇고, 방송 중에서도 오락성이 강할수록 더 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무슨 식품이 몸에 좋다고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시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들 아는 대로다. 의사가 한번 방송을 ‘타려고’ 그렇게 기를 쓰는 이유도 뻔하다. 신문에 소개된 최신 요법은 채 검증되기도 전에 입소문을 타고 전국의 환자를 움직인다.

이러니 다들 언론을 활용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때로는 은밀하게 또 다른 때는 아예 노골적으로 언론과 기사에 줄을 댄다. 많은 세계 최초와 최고, 그보다 더 많은 한국 최초와 최고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또 소비된다.

흔히 쉽게 한국 언론의 수준 미달을 말한다. 그러나 선진국 언론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서 으레 있는 사소한 부작용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봐야 할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언론은 한 사회의 ‘정신적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즉, 사람들의 관심을 정하고 사물을 보는 눈을 틀 지우는 것이다. 당연히 사회적 권력 관계의 균형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건강과 의료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것에 관심을 둘 것인가부터 해석과 해결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더 큰 권력을 치우치게 반영한다. 몇 가지 특성만 보자.

첫째, 많은 건강 문제와 질병을 ‘개인화’한다. 문제의 원인은 물론이고 해결 방법까지 개인의 노력과 책임을 앞세운다는 뜻이다. 언론의 주된 소비자가 개인이라는 것을 명분 삼지만, 알게 모르게 문제 많고 의지 약한 개인을 윽박지른다.

스트레스, 불규칙한 식사, 잦은 음주… 어느 프로에나 등장하는 건강 위험요소다. 개인이 가진 문제고 결국에는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그렇지만 이들 요인은 한 꺼풀만 벗기면 생활의 근본 조건과 뗄 수 없다. 개인의 과제인 동시에 구조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나 언론이 다루는 개인은 흔히 구조와 분리되어 진공 속에 있다.

해결을 개인에 의존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온갖 스트레스 해소법은 난무하지만 노동조건은 한 줄 배경으로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 머문다. 한참 유행인 힐링 열풍도 그렇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마음공부가 필요하다는 처방 이상을 보기 어렵다.

둘째로, 의료 역시 상품이라는 논리를 충실하게 가르친다. 영리병원이나 민간보험을 적극 옹호하는 것은 본래의(?) 기능이라 치자. 좁은 의미의 건강이나 의료만 하더라도 언론의 관심은 첨단, 최고, 최대, 최초에 한없이 쏠려 있다. 한 마디로 돈 되는 것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에 비하면 예방이나 건강증진이 주장하는 꾸준하고 일상적 실천은 설 자리가 없다. 동네의 일차의료도 마찬가지다. 뉴스거리로는 맹물처럼 심심하고 그렇다고 토크쇼에 나올 매력도 없다. 언론과 의료 어느 쪽으로도 구매력이 떨어지는 경제적 약자, 장애인, 취약집단, 비수도권을 다루는 것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언론은 흔히 대중의 관심을 탓한다. 뉴스와 오락 프로그램이 소비되려면 독자와 시청자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도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에 맞출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자나 피디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언론의 행동을 둘러싼 구조가 본디 그런 것이다. 자본은 끝없이 시장을 확장하려고 하고, 욕망과 선호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당연히 계급적이고 불평등하다. 언론 역시 열심히 시장에 봉사할 뿐이다.

셋째, 많은 것을 새로 의료의 대상으로 만드는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을 영어로는 ‘메디칼리제이션’이라고 하고 의료화라고 번역한다. 의료가 상업화되는 순간 나타나는 중요한 사회 현상이다.

용모와 관계된 성형수술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공부가 부진한 것이 어느새 학습‘장애’가 되었고, 부부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부부‘치료’의 영역으로 취급된다. 요즘은 취업이 큰 관심사니, 조만간 회사형 인간으로 개조하는 의학 프로그램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지식과 기술이 발달해서 새로 진단과 치료를 하게 된 것, 예를 들어 중풍 환자가 전과 달리 모두 시티를 찍는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화된 것들이 주로 상품과 돈과 연관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더 많은 의학 기술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결핵 문제는 개선이 몹시 더디다. 더 많이 의료화가 진행되었어야 할 만성 정신질환은 오히려 오랜 기간 방치되고 있다. 상품성이 약하고 돈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론이 무슨 책임이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의료화는 의사와 병원의 사사로운 자가 발전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찾는 의료산업이 의료화 경향을 주도한다. 그러나 새로운 소비자를 찾는 언론의 이해관계 역시 작다고 할 수 없다. 의료산업과 언론이 공생관계에 있는 것이다.

군산(軍産)복합체라는 말을 살짝 비튼 ‘의산(醫産)복합체’란 말은 1980년 미국 하버드 의대 교수인 아놀드 렐만이 처음 사용했다. 의사와 병원, 보험회사, 제약기업, 의료기기업체, 다른 사업체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만드는 이해관계 네트워크를 뜻한다.

이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협력하면서 공공 보건정책과 제도를 통제하고 힘을 미치려고 한다. 또한, 한 사회의 건강과 의료가 흘러가는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 물론, 공익보다는 사사로운 이익이 우선이다. 군산복합체의 핵심인 무기산업의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면 이 말이 의도하는 것을 이해하기 쉽다.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는 의산복합체에 한 가지를 더 보태야 한다. 언론이 제3의 행위자로, 의산복합체가 작동할 수 있도록 촉매 또는 접착제 구실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산복합체는 ‘의-산-언’ 복합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건강 측면에서 언론의 제 기능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이것이다. 흔히 언론 개혁과 대안 언론을 말한다. 하지만 의산언 복합체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 개혁의 목표는 공정성이라는 오랜 과제를 넘어선다.

시장을 넘어 공공성을, 상품을 넘어 형평성을 제대로 살려 낼 때 언론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전문성의 불균형보다는 참여하고 같이 결정하는 새로운 힘의 균형이 작동해야 한다.

의-산-언 복합체는 해체되고, 민(民)-의‘-산’-언‘ 복합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를 바란다.

(의’, 산‘, 언’은 새롭게 바뀐 의, 산, 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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