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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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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소(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미투운동에서 성폭력 생존자들의 용기, 이들을 지지하는 목소리들 사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생존자의 ‘트라우마’라는 정신의학적 진단이다. 생존자의 고통이 알려지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이러한 진단은 그간 생존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리는 증거이자 젠더 불평등의 현실을 고발하는 무기가 되었다. 그런데 트라우마 개념이 쓰이는 맥락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일까?

 

국제 학술지 <영국 사회복지 저널 British Journal of Social Work>에 실린 시드니 대학교 엠마 세리스의 논문은 아동학대를 경험한 여성 청소년들과 대면하는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회복지 실천에서 쓰이는 트라우마 개념의 유용성을 고찰한다(☞논문 바로가기: Social Work and Women’s Mental Health: Does Trauma Theory Provide a Useful Framework?).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호주 시드니에서 아동청소년 정신보건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사회 정신보건서비스 기관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들이다. 이들은 정신과 자문의사와 협력하면서 청소년의 정신건강과 심리사회적 요인들을 평가하고 치료 지원을 제공하는 다학제 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연구자는 이들에게 학대 경험이 있는 여성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활동에서 트라우마를 어떻게 개념화하고 있는지 물었다.

 

우선. 인터뷰 참여자들은 아동학대 문제를 정신건강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늘어났다는 점에 모두 동의했다. 더욱이 학대 경험이 여성 청소년의 정신건강과 관련 있다는 점, 그렇기에 학대 경험을 알아내고 트라우마에 개입하는 것이 정신보건사업에 필요하다는 데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개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터뷰 참여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신보건사업에서 폭력과 그것의 영향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이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대 경험에 대한 평가와 트라우마에 대한 개입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일부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들은 학대가 정신건강과 관련은 있지만 일차적 중요성을 갖는 건 아니라고 보았다. 즉 학대 경험 여부는 정신건강을 평가하는 여러 항목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여성 청소년의 학대 경험 여부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취하는 개입의 초점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회복지사들은 정신의학이 폭력 문제를 다루는데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연구자는 이러한 관점이 상당히 전통적인 정신건강 진단과 치료법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 학대와 트라우마, 정신의학적 병리의 본질적 연관성을 지지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회복지사들은 여성 청소년들이 경험한 폭력이 그들의 정신의학적 병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정신보건사업에서 이를 다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학대로 인해 여성 청소년들이 나타내는 증상, 이를 이해하기 위한 표준화된 진단 도구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진단 도구들이 트라우마 서사의 복잡성 속에서 확실성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연구자는 이러한 증상 중심 접근이, 내담자가 사회복지사에게 자신의 학대 경험을 자세히 털어놓거나 정해진 치료 지침을 따르도록 독려 받는 위계 관계를 내포한다고 보았다. 더불어 이러한 관점이 정신건강 문제를 여전히 피해자 ‘내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여성에게 가해지는 학대 자체의 부정의함에 대한 인식이 누락된다고 분석했다.

 

셋째, 학대와 트라우마를 사회정의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회복지사들은 젊은 여성의 폭력 경험을 성별에 기반한 억압이라는 폭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내담자와 일방적 관계가 아닌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려 노력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때로는 정신보건 분야의 전통적 상담 방식을 비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여성 청소년에게 수많은 질문들을 하고 길게 인터뷰를 하는 것이 이들이 가정에서 겪은 학대 행위와 비슷한 것은 아닌지 사회복지사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질문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여성 청소년이 정신보건서비스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질문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정신보건기관 방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등 기본 질문을 종종 빼먹는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연구는 치료 전략과 치료적 관계 자체가 어떻게 젊은 여성을 둘러싼 젠더 권력 차이를 지속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탐색했다. 이를테면 이 연구는 여성과 남성 사회복지사를 각각 9명과 3명 인터뷰했는데, 흥미롭게도 성별은 앞서 말한 세 관점에 차이를 낳지 않았다. 일부 남성 사회복지사는 남성에게 학대당한 여성을 상대하는 남성으로서, 자신이 그녀의 치료를 주도하는 ‘전문가’가 되거나 여성의 삶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음을 인식하고 경계했다. 이들은 여성 청소년이 자신이 도움 받을 사람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성 청소년이 남성에게 학대를 당했음에도 이들의 회복에 어머니가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을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트라우마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을 가진 남성 사회복지사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이 학대를 당한 여성 청소년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직 학대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여성 청소년이 남성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남성에 대한 사고가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젠더 폭력을 경험한 내담자와의 치료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젠더 권력 관계를 성찰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입장은 학대 경험과 트라우마를 정신건강의 부차적 요소로 사고하는 첫 번째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반면, 세 번째 관점을 가진 사회복지사들은 치료가 내담자의 문제를 다루는 것 이상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치료적 관계는 내담자들에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그 안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고통 경험을 반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트라우마 개념이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학대를 경험한 생존자를 최전선에서 만나는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트라우마 개념을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트라우마는 여성의 정신적 고통을 의료화하고 젠더 불평등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부권주의적 방식으로 적용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정의 관점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한 형태와도 연결될 수 있다. ‘트라우마’라는 말이 일상적 용어가 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치료가 필요한 의학적 상태가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질서를 생산하는 잠재력을 가진 용어로써 ‘트라우마’ 개념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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