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평을 보는 대부분 독자는 ‘지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떤 형태로든 지식을 생산하거나, 유통하거나, 소비하는 것. 독자, 지식 소비자, 학생, 선생, 교육자, 연구자, 지식인, 출판인, 뭐라고 불러도 지식을 다루는 점은 비슷하다.
지식을 다루는 개인은 누구나 ‘힘’이 없다고 불평하지만, 체계를 갖추고 사회화된 지식의 힘은 막강하다. 지식이 없으면 저렇게 많은 사람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나설 수 없다. 학교에서 배웠든 책을 읽어서 알게 되었든, 갖가지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을 만들고 판단의 힘을 길렀을 것이다. 뉴스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었으니 지금 돌아가는 형편을 이해한다.
‘지식권력’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을 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싫은 일도 하게 하며, 정부나 정책까지 바꾸는 것이 지식의 힘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지식은 더 범위가 넓고 강하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개인이 아니라 ‘제도’가 된 지식의 힘 그리고 권력이다.
지식이 어떻고 권력이 어쩌고 하는 이유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권력관계가 시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쳐서다. 그 지식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애국과 국제경쟁력과 규제완화를 가르치고 그에 따라 나 자신의 행동을 바꿀 것을 강요한다. 지금도 그렇다.
저 말썽 많은 최저임금 결정과정부터 보자. 결정을 내린(왜 올렸다고 하지 않고 내렸다고 할까) 곳은 최저임금위원회. 결정을 좌우하는 이른바 공익위원 8명은 전원 교수이거나 연구위원이다(기사 바로가기). 여기서 지식은 무슨 구실을 하는가?
지식과 그 지식을 상징하는 개인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활용된다. 소비된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어디 최저임금 결정만 그런가. 논란이 있는 모든 자리에서 지식은 결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그리고 교수와 연구위원은 제도적 지식을 상징한다.
최저임금 결정에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 따져봐야 하겠지만, 도대체 이들 공익위원이 무슨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권력을 허용하는가. 지식권력이라지만 지식은 보잘것없다. 최저임금이라는 정말 중요한 결정을 한 ‘근거’를 두고 이 정도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는 마당에(기사 바로가기).
위원장도 “위원장으로서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최근 어려운 경제 여건에 대한 정직한 성찰의 결과”라고 밝혔을 뿐, 내년도 최저임금의 구체적인 산출 기준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동원되고 소비되는 정도를 넘어, 지식은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뜨거운 이슈인 인보사 사건. 현직 식약처장의 연구용역을 둘러싼 논란이 지식권력의 또 하나의 모습이다.
윤 의원은 “당시 이 처장이 작성한 연구 보고서에서 ‘인보사는 중증도 무릎 골관절염 증상과 진행을 억제하는 약제로 대체 가능한 약제가 없다’거나 ‘통증 및 기능개선 임상효과와 안정성이 입증됐다’, ‘보험급여 기준에 적합하다’고 쓰여 있다”고 지적했다. (기사 바로가기)
지식권력이 작동함을 그래도 보여 주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같은 기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700만원이 넘는 비싼 약이지만 당시의 임상결과로 4만~5만원인 기존 약에 견줘 우수한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인 셈인데, 이 처장은 이와는 정반대로 비용에 견줘 효과가 좋다고 결론을 썼다는 것이다.
어떤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논의한 과정을 보면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것이 있었으면, 보험급여를 신청한 쪽에서 석 달 만에 스스로 철회했을 리 없다. 그는 지식권력, 그리고 과학적 근거가 없는 지식을 활용해 건강보험 급여를 결정하는 과정에 개입했다.
지식권력이 작동하는 과정에 단연 띄지 않는 것은 생산과 그 행위자(생산자)다. 그야말로 블랙박스. 지식을 다루는 사람이 왜 인공지능에, 양자역학에, 농촌 경제에, 기후위기에, 건강 불평등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지식을 찾는 동기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어디서 데이터를 얻고, 어떻게 실험을 진행했으며, 분석과 측정을 어떻게 했는지, 무엇은 포함하고 무엇은 버렸는지, 그 대부분도 잘 알 수 없다.
최악은 조작, 사기, 허위 보고 따위이다. 없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하는 것. 더 교묘한 것은, 의도든 실수든 또는 무의식이든, 한쪽을 부풀리고 다른 쪽은 감추거나 무시하거나 놓치는 것이다.
권력으로서 지식은 지식과 생각뿐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물질’로 개입한다. 지식권력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인보사 사건은 거짓 지식의 위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다. 제약사는 안전하다고 주장하나(이 또한 지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다(지식의 한계). 이제 위험은 온전히 환자들의 몫이다.
지식권력이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지식이 사람과 삶에 봉사하는 권력이 아니라 억압과 부자유, 고통을 강요하는 권력이 될 때, 그 지식권력은 해방의 주체(또는 도구)가 아니라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지식권력은 사회적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며, 지식의 장(場)은 가장 치열하게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해야 한다. 지식을 다루는 한, 어떤 영역도 예외가 될 수 없고, 어떤 개인도 이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 우리는 특히 개인이 해야 할 책임을 따져 묻는다(우리 연구소의 다짐을 겸한다). 첫째, 나도 지식권력의 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늘 인식하는 일. 예를 들어, 흔히 생산자가 아니라 전달자를 자임하는 교사나 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설명할지, 노동자의 권리인가 경제성장의 장애요인인가, 늘 지식을 고르고 변용한다. 학생의 생각과 행동, 삶에 개입하는 권력이다. 현실에서 압도적인 지식 전달자, 언론은 두말할 것도 없다.
둘째, 지식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믿지 말자. 최저임금과 건강보험 급여범위의 기초가 되는 지식에 중립성 같은 것은 없다. 지금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보는지, 건강보험이 해야 할 일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지식이다. 지식은 불확실한 동시에 정치적이며 편파적이다.
양자역학 같은 것은 다르다고? 처음에 내가 왜 그 주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식을 습득했으며 어떤 조건에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었는지, 지식을 어떻게 전달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느 것 하나 사회와 환경에 메이지 않는 것이 없다. ‘가치와 무관한 중립적 지식’은 허구다.
셋째, 개인과 그 이해관계가 지식에 개입할 수 있다는 긴장.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수 없으니, 특정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가장 흔한 이유는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노골적인 이해관계도 있으나 나도 모르는 편향과 왜곡도 흔하다. 계급과 계층에 따른 비뚤림은 그중에서도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지식의 윤리와 책임을 다하는 방법.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민주적 통제가, 개인 차원에서는 성찰이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오해가 있을까 보태자면, 이 성찰 또한 개인의 품성과 능력,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사회가 개인에 개입할 때 각자가 반응하는, 말하자면 사회적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