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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도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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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나와 내 가족의 질병과 죽음, 혹은 일자리의 상실처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혹자는 불확실성의 미학을 이야기하며 지금의 현실을 담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때로는 담대한 의지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에 불확실성이 최소화되길 바라고, 그 불확실성을 대응 가능한 범위로 유지해보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불확실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가 수준의 불확실성이 그렇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국가적으로 맞게 된 불확실성 상황이 시민들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영국 킹스칼리지와 미국 하버드대학교 공동연구팀이 국제 학술지 <역학과 지역사회 건강>에 출판한 최근 논문은 유럽연합 탈퇴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영국인들의 항우울제 처방량 변화 추이를 분석했다 (논문 바로가기: 유럽연합 국민투표와 정신건강: 영국 항우울제 처방 데이터를 이용한 자연 실험).

 

2016년 즈음 영국 사회는 이민자와 난민이 증가하는 가운데, 2008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유럽연합 분담금 증가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연합에 계속 잔류하는 것에 대한 회의론이 당시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유럽연합 탈퇴(일명 브렉시트)를 묻는 찬반 국민투표가 진행되었다. 혼전 속에서 51.9% 찬성에 의해 영국은 유럽연합 탄생 이후 최초로 회원 탈퇴국가가 되었다. 브렉시트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연합, 그리고 국제 경제에도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영국인들의 투표 결과는 영국을 넘어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국민투표에 의해 브렉시트가 결정되기는 했지만,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혼돈의 시기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2011년 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의 약물처방 데이터를 이용하여, 항우울제 처방을 받은 집단을 처치군으로, 정신질환과 관련이 없는 약물, 예컨대 통풍치료제나 근육이완제 등을 처방받은 이들을 대조군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두 집단의 처방량 차이를 두 시기, 즉 브렉시트 찬반 투표 전후에 걸쳐 비교하는 이중차분법을 이용하여 분석했다.

 

우선 연도별로 약물처방량 추이를 살펴본 결과, 처치군과 대조군 모두에서 시간 흐름에 따라 처방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결과를 보였다. 주목할 점은, 일정시간이 경과한 후 대조군에 속한 일부 약물의 처방량은 감소했지만, 항우울제 처방량은 지속적인 증가 패턴을 보인 것이다.

 

이중차분법 분석 결과, 처치군, 즉 항우울제 처방을 받은 집단의 1인당 처방량 변화는 대조군의 1인당 처방량 변화와 비교했을 때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유의하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7월의 자료만을 비교했을 때에는 13.4%의 증가량 차이를 보였고, 매년 12개월 치 자료를 이용하여 비교했을 때에도, 약 12.4% 증가량 차이를 보였다. 또한 브렉시트 찬반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브렉시트 찬성율 또는 반대율이 60% 이상인 지역을 구분하여 추가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지역의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항우울제 처방량이 유의하게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항우울제 처방 증가를 모두 브렉시트 투표 결과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연구팀도 이에 대해 조심스러운 해석을 당부했다. 하지만 브렉시트에 대한 국민 투표로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초래되었고, 불확실성은 정신적 고통을 초래한다는 점을 논문의 저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누군가는 브렉시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불가피하게 이직을 해야 하거나, 혹은 물가가 폭등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특히 브렉시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난민과 이민자들의 대규모 유입 이후 커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중압감은 더욱 클 것이다 (관련 기사: 브렉시트의 진실, 더 불평등한 영국으로!).

 

문제는 국민투표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국의 상황이 여전히 안개 속이라는 점이다 (관련 기사: EU, 브렉시트 내년 1월 말까지 3개월 ‘탄력적 연기’ 합의). 지루한 연장 논의가 반복되며 2020년 1월 31일까지 유럽연합 회원국 자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후에 또다시 일정을 연기할지, 브렉시트가 마침내 성사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논문의 서두에서 저자들은 “정책입안자들이 브렉시트가 초래할 잠재적 비용으로 경제와 이민에만 주목하고 사회심리적 건강을 간과”했음을 지적했다. 브렉시트 같은 정치경제적 충격은 고용과 경제에 구체적 영향을 미치기도 전에 이미 건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까지 결정이 미루어지는 동안, 불확실성 그 자체로 인해 영국인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는 더 심각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오늘 소개한 논문이 결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한반도의 굴곡진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 2~3년만 돌아보아도 대통령 탄핵과 이른 대선,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남북관계와 국제 정치지형, 경기변동에 이르기까지, 불확실성은 항상 한국인들 곁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는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는 오래된 말은 비단 경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건강도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위한 건강 정책, 사회안전망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 서지정보

Sotiris Vandoros1, Mauricio Avendano, Ichiro Kawachi. The EU referendum and mental health in the short term: a natural experiment using antidepressant prescriptions in England. J Epi Community Health 2019;73(2) http://dx.doi.org/10.1136/jech-2018-210637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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