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이른바 ‘뉴노멀’의 실상과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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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풍경은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 사람이 넘치고 표정과 행동도 거의 그대로다. 정부와 방역 당국은 연달아 경고를 내놓지만 이에 맞추어 긴장을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확진자가 10명 이하로 줄고 그나마 국내 감염자가 거의 없어지니, 어쩌면 당연한 사회적 반응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같은 강도로 계속 유지하기 어려운 것도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생활의 어려움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비정상적’ 삶을 무한정 끌어갈 재간은 없다.

 

봇물 터지듯 ‘뉴노멀’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이 유행이 끝나더라도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뉴노멀의 요지다. 지금의 태세를 더는 유지할 수 없어서 나온 궁여지책이기도 하다.

새롭다는 뜻으로 ‘뉴(new)’가 붙었으니 과거와 단절할 수 있을까. 방역 당국이 권고한 “생활 속 거리 두기 세부지침”만 해도, 이대로 지키기만 하면 제법 새로운 변화라 할 만하다. 그토록 어렵다던 온라인 교육 활성화가 단숨에?

 

 

하지만 흔쾌하지 않다. 이 <논평>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어떤가? 어떤 것은 크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시시콜콜한 권고들, 유행이 한창일 때(예외상태)는 당연히 따르고 실천했던 것을 지금부터는 늘, 그리고 끝까지 할 수 있을지(정상화),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뉴노멀이 전망과 예측, 또는 희망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과정과 정치이며, 축적과 실천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뉴노멀의 다음과 같은 특성 몇 가지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다.

 

첫째, 뉴노멀은 저절로 그리되지 않으며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은 다 그만한 연유가 있다. 다닥다닥 붙어서 회식을 하고 짐짝처럼 지하철을 탔던 지난날이 모두 원해서 그리된 것인가? 미리 정교한 계획이 있진 않았지만, 우리가 만들고 또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온갖 사회는 충분히 ‘이성적’이다.

가만히 있어도, 덜 모이고 더 멀리 떨어지며 개인위생이 나아질 리 없다. 누군가 바뀌어야 하고 또 누가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한다. 마스크를 써야 할 뿐 아니라 그래도 괜찮아야 하며, 손을 잘 씻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럴 수 있도록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개인이 노력한다고 가능한 일은 적다.

‘저절로’보다 더 위태로운 것은 개인의 결단과 변화로 새로운 노멀이 가능하다고 보는 태도다. 가장 작은 개인행동조차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사람 사이에 간격을 두라는 말, 어느 상황 할 것 없이 이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될 일인가.

개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모든 것을 ‘개인화’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개인화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로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아프면 집에서 쉰다’는 것.” 냉정한 현실에서 개인화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이렇게 바꾸는 것이 맞다. “기업(고용자)으로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아프면 임금 손실 없이 집에서 쉴 수 있게’ 하는 것.”

 

셋째, 정치적이며 또한 ‘권력 투쟁’이다.

예외상태와 정상은 권력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코로나19 유행 시기 한시적으로 허용했던 원격의료(비대면 진료)를 그대로 두자는 힘이 있는가 하면, 더 넓은 범위의 원격의료를 정상화하자는 시도도 있다. 코로나 유행에서 위력을 증명한(?) 바이오와 정보통신기술을 주류화하려는 권력은 더 강하다.

과거 상태(원상)로 돌아가자는 ‘올드노멀’의 동력도 함께 봐야 한다(더 중요할 수도 있다). 방역 당국은 “재택근무, 병가·연차휴가·휴직 등을 사용하고 출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지만, 어느 기업 어떤 자본이 이를 새로운 노멀로 받아들일까.

“사업장 내 노동자 간 간격을 2m 이상 유지”하는 것과 이천의 그 황당한 사고가 서로 연결이 되는가? 누구나 그러하듯, 과거가 좋았으면 안간힘을 다해 그곳으로(올드노멀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올드노멀이 이제 뉴노멀이라는 허울을 쓰고 나타나리라.

지금 누가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 관계를 묻는 것은 새삼스럽다. 그보다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뉴노멀이든 올드노멀이든 그것이 정상이 되도록 개인과 집단, 신체와 마음, 사회와 문화를 장악하는 것은 선택적이며 권력 의존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권력이 작동하고 힘을 실현하는 메커니즘.

 

넷째, 그렇지만 현재의 실천으로 미래의 노멀에 개입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예외상태와 정상화를 둘러싼 경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논평 바로가기). 선거가 끝났으나 이 경쟁(또는 모순과 갈등)의 근본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코로나 유행과 판데믹이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가 되었으니, 선거는 이 예외 상태를 어느 쪽으로 ‘정상화’하는지 갈림길 노릇을 할 것이다. 무지막지한 해고와 실업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것인지, 영국처럼 임금의 80%를 국가가 보전해 주는 임시 조치를 도입할지. 정상화란 본래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으레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요구하며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경우든 현재의 행동과 말은 미래에 개입한다. 당연히 할 일이 있다. 마치 바이오와 정보통신기술, 비대면 진료, 백신이 시민의 생명과 안전 전부를 보장한(보장할) 것처럼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해고, 소득 절벽, 재정 건전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도 곤란하다.

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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