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파업이 한국 사회에 미친, 그나마 긍정적 영향 한 가지는 ‘개혁’이라는 말을 살려낸 것이다. 누가 어떤 뜻으로 이 말을 썼는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살아났다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 개혁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얼마나 힘이 있는지는 미지수, 이제 막 싹이 난 정도니 살지 죽을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백가쟁명이 되기를 바라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지금이야 다들 감정이 상하고 에너지가 분출하지만, 사건은 금방 익숙해지고 곧 피로감이 생긴다. 금방 일상에 몰리고 다른 현안에 묻히는 것이 당연지사.
이번 사태의 출발이 진정한 의미의 개혁과 무관한 것도 나쁜 조건이다. 의대 정원이나 공공 의대 문제가 개혁이라 부를 만한 일인가? 어떤 의미든 개혁이라 하려면, 이보다는 더 종합적, 구조적, 근본적이어야 한다.
또한, 대부분 사람에 좋은 쪽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개혁은 공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어야 한다. 특정 직종이나 집단의 자기 이익 실현을 위한 대안을 개혁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을 터, 불거진 문제만 해결하려 하면 개혁은 없다.
하지만, 그 누구의 의도와도 관계없이 보건의료 개혁은 공론장에 진입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맞은 기회다. 개혁의 구조와 메커니즘, 전략은 다음 차례로 미루고, 오늘 <논평>은 ‘개혁의 정치’에 집중하고자 한다. 개혁은 정책이 아니라 정치임에, 이의 정치를 이해하지 않고는 사회적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 변화의 기초인 어떤 공감대와 동의도 불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보건의료 개혁의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언제? 얼마나 크게? 어느 쪽으로? 개혁이 반드시 ‘변화’를 의미한다면 이미 존재하는 구조와 힘의 관계를 바꾸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현상을 바꿀 만한 힘이 없으면 개혁은 힘들다.
그 힘을 사람 중심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변화와 개혁이 절박한 자가 누구인가?” 여기서 ‘절박함’이란 현실의 고통인 동시에 미래의 전망이자 욕망이며, 절박하다고 하려면 어느 정도 이상 강하고 충분히 지속적이어야 한다. 아주 가끔 일이 있을 때나 현상 변화를 꿈꾸는 정도로는 변화와 개혁의 에너지가 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변화가 절박한가? 비수도권 인구 감소지역의 주민? 빈곤층 노인? 치매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가족? 다들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유감스럽게도 국가 차원에서 보건의료 개혁을 추동할 에너지가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다.
난관을 뚫고 반대를 압도하는 힘을 축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숨기거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박한 고통과 욕망이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가 힘들고 아파도, 다른 현실을 간절하게 바라는 때도, 스스로 잘 모를 수 있다. ‘사람 중심’으로 보면 더 그렇다. 인구가 줄고 노인만 남아 있는 농촌에 사는 주민이 괜찮은 의사와 병원이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스스로 힘들다고 말하지 않으면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동에만 서너 시간을 쓰지만 ‘빅5’에 갈 수 있다고 해서 돈과 시간과 노력이 즐거울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고통이 아니라 상대적 ‘우월’이나 ‘특권’으로 여길 수도 있다. 누가 어떤 시각으로 봐도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당사자가 다르게 해석하며 주관적 고통과 객관적 고통은 일치하지 않는다. 마땅히 객관적인 고통을 내 탓(“이런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내 능력”) 또는 내가 누리는 우월한 조건(“그 정도는 비용을 낼 수 있으니”)으로 개인화하는 순간, 그 고통은 다르게 이해되고 내면화되는 법이다.
또한, 고통의 인식과 표현은 정치적이며 권력 관계의 산물이다. 한국 사회에서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을 정의하지 못하는 일이 흔하며, 인식하는 때에도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객관적 고통은 신문과 방송에 나오기 어렵고 국회에서 다루는 일도 드물다. 연구하는 사람은 적고 정보와 지식도 부족하다.
고통이 커도 그것만으로 개혁에 다다르지 못하며, 이 또한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절박한 고통과 욕망은 시작 시점의 동력일 뿐이며, 복잡하고 어려운 변화 과정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정조차 불평등하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실을 어떻게 보는 때도 객관적 고통은 엄존한다. 하지만, 이런 정치와 권력 관계 때문에 좀처럼 변화와 개혁의 에너지로 전환되지 않는다. 공공보건의료 강화보다 ‘각자도생’이 더 현실적인 답인데, 개혁에 관한 관심과 요구가 ‘합리적’인 실천이 되기 어렵다.
그럼 정부는 절박한가? 정부가 개혁에 대한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백 퍼센트 정치적 결정이다. 한 사회가 이건 마땅히 국가와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고 이해하면, 최소한 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정부의 실천 원리가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이번 의사 파업 사태의 경과와 결말은 국가권력과 정부에게 꼭 불리한 것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는 ‘투항’이나 ‘패배’도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 만약 지금 진행되는 방역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도 책임을 의사 파업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최악으로 봐도 정치적 무승부다.
한편에서 공공보건의료 논의를 추진할 것이라 약속했으나, 정부와 여당에 개혁이 그리 절실한 과제일까? 특히, 정책보다 통치의 우선순위가 높다는 사실을 기억하자(통치에 대해서는 이전 <논평>에서 다루었다.). 공공보건의료를 비롯해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제시해야 할 ‘대비 체계’ 또는 ‘체계 정비’도 미루거나 피할 명분을 얻었다. 당장 절박할 이유가 무엇일까.
요약하면, 정치적 관점에서 보건의료 개혁의 동기는 매우 약하거나 왜곡되어 있다. 일부 이익집단이나 정부가 아니라 사람(국민, 시민, 인민) 관점의 개혁이라면 ‘부재’ 상태에 가깝다. 관료와 전문가의 개혁론도 마찬가지, 정치적 이해관계가 절박하지 않고 힘도 충분하지 않다.
이 <논평>의 상황 진단이 비관과 냉소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 모든 개혁에서 이런 종류의 불리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롭게 절망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조건과 환경이 우호적이고 쉽게 될 일이면 처음부터 개혁이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객관적 고통이 존재하고 따라서 과학과 객관으로 개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어떤 개혁을 어떻게?”라는 질문은 조금 미루자. 그보다는 먼저, 개혁의 동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주체가 누구인지, 어떻게 ‘주체화’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누가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개혁을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