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보건의료 ‘개혁’을 위해(2) – 개혁이 어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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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무엇을 뜻하든 ‘개혁’은 어렵고, 보건의료 개혁도 마찬가지다. 쉬우면 ‘변화’나 ‘수정’ 또는 ‘새로운’이라고 부르지 개혁이란 말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지난주 <서리풀논평>의 마지막 부분도 이런 취지다).

 

“모든 개혁에서 이런 종류의 불리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롭게 절망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조건과 환경이 우호적이고 쉽게 될 일이면 처음부터 개혁이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백가쟁명으로 나오는 모든 제안과 대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이 바람직하다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으며, 장담하건대 백 퍼센트 동의하는 것조차 바로 시작하기 힘들다. 지금까지 잘되지 않았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 제대로 인식해야 하며, 무엇이 왜 어려운지 구조와 현상의 원인과 해결책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개혁이 어려운 첫째 이유가 보건의료가 ‘경제’이자 ‘산업’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유일한 속성이라는 뜻은 아니다). 보건의료 개혁의 방향과 목표, 과정은 보건의료 경제와 산업에서 떨어질 수 없고, 좋든 싫든 그것이 사회적 실재(實在)로서 보건의료가 처한 조건이자 현실이다.

 

 

굳이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제와 산업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개별 주체에게 그리고 일차적으로 경제와 산업은 일자리이고 수입이며 또한 생계이다. 다른 편에서는 지출이고 가계 부담이며 때로는 빚(부채)이다. 즉, 먹고 사는 문제라는 뜻.

 

간단한 통계수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1/4분기 보건산업 종사자 수는 약 92만 5천 명으로, 분야별로는 의료서비스 76만 2천 명, 의약품 7만 3천 명, 의료기기 5만 2천 명에 이른다(자료 바로가기) ). 이들의 경제 활동은 곧 비용이고 가계 지출이다. 그 한 가지 결과로, 우리는 한 가구당 건강보험을 제외하고도 연평균 209만 원(2017년 기준)을 넘게 부담한다(기사 바로가기).

 

경제에서는 절대량뿐 아니라 ‘운동’도 중요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는 늘 ‘균형’을 추구하고 또한 압박한다. 거대 병원이나 잘 되는 의원이라고 늘 여유가 넘쳐날까? 소득이 좀 크다고 해서 세금과 보험료 인상을 반길까? 경쟁력과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자본, 그리하여 더 많은 수익이 필요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건의료 개혁은 대부분 이런 경제적 균형을 바꾸는 일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수가를 올려 “동네 의원을 살리자”라고 하면, 국민이 보험료나 세금을 더 내거나 중소병원이나 대학병원에 돌아갈 몫을 줄여야 한다.

 

그 정도가 무슨 개혁 축에나 드느냐 싶은 동네 의원의 입원실 없애기. 약간만 제도를 바꿔도 작은 개혁이 가능할 것 같지만, 이해 당사자는 균형을 유지하려 격렬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다(기사 바로가기). 병원 규모나 안전과 같은 전형적이며 기본적인 국가 정책, 게다가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책에 대해서도 이해관계 표출을 꺼리지 않는다(기사 바로가기).

 

‘파이 나누기’ 또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면 이런 어려움은 좀 덜하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다. 장기요양보험을 새로 만들 때, 그리고 지금 계획 중인 ‘커뮤니티 케어’를 생각해보라. 이들 ‘개혁적’ 제도의 경제적 의미는 새로운 시장과 수익의 원천이라는 것으로, 경쟁과 갈등은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배분하는지에 집중된다. 미래이고 잠재적 이익이니, 드러나도 좀 더 온건하게(?) 보이기 쉽다.

 

구조와 이해관계가 굳을수록 현상 유지의 힘은 강하고 노골적이다. 어느 이해 당사자가 수익이 줄거나 없어지는 것, 그 조건이 어려워지는 것, 또는 새로운 경제적 기회에서 멀어지는 것을 감수하겠는가. 너무나 당연히(!), 사회적 실재와 법칙을 말하는 한 도덕과 규범, 개인적 결단은 완전히 무력하거나 무의미하다. 개인과 집단 모두 균형 상태에 도달해 있을수록 개혁은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기 쉽다.

 

한편, 개혁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관계는 의사나 병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수가를 올리면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수가 만능론‘도 있지만, 그 재원은 어디서 나오나? 그냥 가입자뿐 아니라 경영자 단체도 찬성하지 않으니(보도자료 바로가기) ), 그 어떤 국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 경우는 국고와 세금으로 바꿔도 그 정치경제가 달라지지 않는다.

 

개혁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조건은 이처럼 지난주 <논평>에서 말한 개혁의 고려사항, 즉 개혁이 절박한 ‘주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조건과 결합해 있다. 한 마디로, 걸림돌은 곳곳에 널려 단 한 걸음도 떼기 어려운데 개혁의 동력조차 미약하다는 뜻이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 <논평>의 진단도 비관과 냉소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개혁은 우호적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런 개혁은 없으며, 비슷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개혁으로 부르지 못한다. 결국,

 

객관적 고통이 존재하고 따라서 과학과 객관으로 개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어떤 개혁을 어떻게?”라는 질문은 조금 미루자. 그보다는 먼저, 개혁의 동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주체가 누구인지, 어떻게 ‘주체화’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질문과 과제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개혁을 원하는가? 숨은 개혁의 동력과 그 주체를 어떻게 현실로 만들 것인가? 누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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